“시험 없어 학력 떨어지면 어쩌지?”
취지 좋지만 우려도 많은 자유학기제
‘성장기록지’로 공부·진로 정성평가
‘포스트 자유학기’ 통해 꿈찾기 도와
시행 4년차 베테랑 학교들의 노하우
“학부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1학년 1반부터 4반까지 1주일에 3시간씩 수학을 담당하는 교사입니다. 한 학기 동안 김재은 학생은 이렇게 성장했어요. 평행선과 동위각, 엇각의 성질을 이해하여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등호의 사용과 식의 전개 과정이 논리적입니다. ‘통계 포스터 그리기 프로젝트’ 활동으로 자료에 대한 정리와 분석 능력을 키웠습니다.”
서울 연희중 황유진 교사가 한 학부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이는 황 교사만 쓰는 편지가 아니다. 연희중 교사들은 자유학기제를 보내는 1학년 학생들의 학부모에게 학기 중 2회에 걸쳐 이런 식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두 장 보낸다.
연희중…교사·학부모가 나누는 특별한 편지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3년 과정 가운데 한 학기 동안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토론·진로탐색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제도. 올해로 전면시행 2년째다. 자유학기제에 대해서는 “시험을 안 보면 학력이 떨어지지 않겠냐”, “겨우 한 학기 과정으로 아이들이 변하겠냐” 등 우려가 많았다.
연구학교 기간 등을 포함해 올해로 자유학기제 시행 4년차에 접어든 연희중은 지필 평가가 없어진 자리에 편지 형식의 ‘학생 성장기록지’(이하 기록지)를 도입했다. 김재은양의 부모 최은경씨도 ‘시험을 안 본다’는 말에 걱정부터 앞섰지만, 학교에서 보내준 교과별 기록지와 ‘서울역사탐방’ 활동 내용을 보고 걱정을 조금씩 덜었다. ‘국어 90점, 수학 85점, 영어 80점’ 등이 적힌 기계식 성적표가 아니라, 기록지를 통해 아이가 각 과목에서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부족한 단원과 범위는 어디인지를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매주 금요일 진행하는 역사탐방 프로그램 기록지에는 딸이 ‘도산 안창호 기념관’에서 활동한 사진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에 대한 수업 내용·이해도 등이 적혀 있었다. 교사들이 쓰는 기록지는 ‘3월부터 현재까지 ○○○ 학생은 수학 시간에 아래와 같이 학습하고 있습니다’, ‘통계 단원에서 자주하는 실수’, ‘선생님, 저는 단원별로 이 정도 이해하고 있어요’ 등 교사와 학부모, 학생까지 참여해 학습발달상황은 물론 생활태도까지 상세히 알 수 있게 돼 있다.
지금은 ‘자유학기제 베테랑 학교’로 입소문이 났지만 4년 전 이 학교 교사들도 고민이 많았다. ‘정기고사를 치르지 않아 점수가 안 나오는데 아이들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자문하며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실험과 공작으로 아인슈타인 따라잡기’ 수업을 진행하는 박은진 과학교사는 “자유학기제 취지대로 활동 중심 수업을 하면서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수업 과정을 공유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
“부모 세대의 성적표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매겨진 ‘일방적인 점수’로 가득했죠. 하지만 기록지는 교사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학생의 평소 학습태도와 교사의 편지, 학생 소감과 자기성찰, 학부모의 답장이 순서대로 담깁니다. 덕분에 ‘움직이는 교실’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과목 점수로 등급을 구분하지 않고 기록지에 학습 성취도를 자세히 써주면서 아이들은 공부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됐다. 황 교사는 “한 예로, 기존의 지필 평가에서 ‘수학 40점’을 받은 아이는 낮은 점수 때문에 주눅 들어 ‘수포자’가 됐었는데, 기록지로 서술형 평가를 진행하니 스스로 학습태도를 성찰하며 자기주도 학습력을 키우더라”고 했다.
3학년 이준기군은 “단순히 수학 문제만 많이 푸는 게 아니라 왜 그 답이 나왔는지 과정을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며 “틀려도 빨간 색연필로 긋지 않고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 충분히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국어의 경우 스스로 문장 이해력을 키우고 싶어서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수업 끝난 뒤 피시방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게 됐고요.”
불안감 많은 1학년 1학기 적응기간 충분히 줘
보통 2학기에 진행하는 자유학기제를 이 학교에선 1학년 1학기에 시작한다. 초교 졸업 뒤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상급 학교에서 생활하고 학습하는 법을 차근차근 익히도록 적응 기간을 주자는 취지다.
매년 2월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연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학부모들은 ‘교복 입은 우리 아이’가 중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지, 자유학기제의 취지와 평가 방법 등에 대한 안내를 받는다.
황 교사는 “초등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올라가는 것과 초등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올라가는 데는 큰 차이가 있다”며 “자유학기제를 1학년 1학기에 진행하면 아이들이 중등 교과목을 덜 두려워하게 되고 ‘학습 친밀도’가 높아져 상급 학교 공부에 대한 심리적인 문턱도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사북중…“우리 학교 자유학기제는 3년 내내~”
“반년뿐인 자유학기제가 실효성 있을지 의문입니다.”
자유학기제를 우려하는 목소리 가운데 또 하나. 보통 한 학기 과정으로 끝나는 자유학기제를 중등 시절 3년으로 확대해 아이들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학교도 있다. 강원 정선군 소재 사북중학교는 2014년 자유학기제 연구학교로 지정된 뒤 ‘자유학기-일반학기 연계 과정’을 뜻하는 ‘포스트 자유학기제’를 자체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 2, 3학년 학생들은 매주 월요일 5~7교시를 활용해 1학년 후배들처럼 자아·진로·직업탐색 등 3단계 진로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카지노’ 등 도박 시설이 가까운 지역 특성상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딜러’, ‘숙박업소 룸메이드’ 등 한정적이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직업 세계의 다양성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기호 교사는 “카지노가 가까이에 있으니 아이들이 ‘직업이 왜 중요해요? 인생은 어차피 한 방이잖아요’라고 말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자유학기제를 한 학기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적성을 찾아주고 진로탐색 활동을 꾸준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우리 지역에도 경찰관, 수의사, 심리상담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일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자유학기제를 통해 가르쳐줄 수 있었습니다.”
탄광촌에 인접한 비도시권이라는 여건 속에서 학교와 지역사회가 협력해 아이들을 교육한 것도 포스트 자유학기제가 안착하는 밑거름이 됐다. 전교생들은 매주 월요일 농협 사북지점 은행원, 한국철도공사 민둥산역 철도공무원, 정선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 연구원, 바리스타 등 26개의 직업군과 만나며 ‘내 꿈을 위한 수업 활동’에 참여한다. 일반학기 연계 과정인 만큼 교과 진도에 차질이 없도록 교사 간 협의를 통한 수업 시수 조정, 핵심 성취 기준에 따른 단원별 재구성, 타 교과 융합 연계 수업 등 ‘교실 수업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꿈 생기자 “공부 이유 찾았다” 말하는 아이들
이기호 교사는 “1학년 때는 장래희망이 없던 아이들이 3년 동안 꾸준히 진행하는 자유학기제 프로그램을 통해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과 공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철학과 교수’, ‘정치인’, ‘경찰관’, ‘수의사’ 등 진로 계획을 세우며 스스로 공부할 이유를 찾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2학년 진기혁군은 “1학년 때는 밴드 동아리를 선택하는 등 취미 활동을 두루 해봤고, 지금은 ‘대학교수’라는 꿈을 위해 독서토론 프로그램인 ‘사북 디베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다”며 “진로체험 프로그램이 한 학기로 끝났다면 적성을 찾기 어려웠을 텐데 3년 동안 천천히 꿈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어 정말 좋다”고 했다.
이 교사는 “‘학력’에 대한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며 “아이들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게 ‘진짜 학력’이다. 꿈이 생기면 혼자서도 공부하는 게 바로 아이들”이라고 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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