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정명진 옮김/부글북스(2016)
약자들은 못난 질서라도 질서가 있을 때 덜 피곤하다.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우리가 대통령 탄핵에 집중하는 사이 국제질서가 한 발짝 더 변했다. 아직은 건설보다 파괴의 시간인 듯 “나부터 살고 보자”는 기조가 뚜렷하다.
이달 중순 끝난 세계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는 공동선언문에서 “어떤 형태의 보호무역주의도 배격한다”는 문구를 빼야 했다. “세계 무역질서가 불공정하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영향을 끼쳤다. 국민투표로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한 영국은 29일 탈퇴 협상에 들어간다.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우 바람이 겨우 제어됐으나, 남은 프랑스 대선, 독일 총선 등 단일 유럽에 결정타를 날릴 지뢰는 널려 있다.
국제질서가 불길한 쪽으로 간다는 이 느낌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집필하던 1919년 케인스의 마음이었을까? 케인스는 1차 대전의 강화회의인 파리평화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가한 뒤 돌아와 두 달 만에 이 책을 탈고한다. 군인 900만명과 민간인 700만명이 사망한 참화 뒤 열린 파리회의는 ‘관용’을 바탕으로 상생의 질서를 싹틔우는 자리여야 했지만 케인스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욕심과 우둔함 때문에 큰 불행을 잉태하는 회의로 비쳤다.
정치적 타산이 경제적 실체를 압도했다. 케인스는 유럽이 역사적, 경제적으로 뗄 수 없는 하나의 체계라고 꿰뚫어봤다. “(유럽 국가들의) 심장은 함께 박동하고 있으며, 이 국가들의 구조와 문명은 기본적으로 하나이다. 이 국가들은 함께 번영했고, 전쟁에서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숨통을 조이려는 시도가 근시안적이라고 봤다.
하지만 전승국 정치인의 ‘목적 함수’는 달랐다. 평화공존에 초점을 맞춘 ‘14개 조 원칙’을 천명하고 대서양을 건널 때만 해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영웅이었다. 하지만 회의장에서 그는 멍한 표정에 졸기도 하는 등 무능해 보였고 실망스러웠다. 이 틈을 타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엄청난 배상 요구로 독일의 팔다리를 잘라놓는 데 전념했다.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다가올 총선에서의 유불리를 셈하는 데 더 분주했다.
케인스는 “사람들은 자신을 빤히 직시하고 있는 중대한 사건들 앞에서 무력감과 나약함을 느꼈”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가 내다본 대로 대공황, 민족주의, 파시즘에 이어 인류는 5천여만 명이 사망하는 또 한 번의 참상에 휘말린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무역위원장인 피터 나바로가 쓴 책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 날>(지식갤러리, 2012)을 보면 “미국 국민이 월마트에서 조잡한 중국산 수입품을 사는 데 1달러씩 사용할 때마다 미국의 실업률 상승에 일조하는 것은 물론 급속도로 무장화를 추진하는 중국군에 자금을 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란 말이 있다. 이게 미국 무역 사령탑의 인식이다. 작용은 더 센 반작용을 부르게 마련인데, 앞으로 어떤 험한 꼴을 더 볼지 모르겠다.
21세기 인류는 100년 전 케인스에게 무얼 듣는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비로소 날개를 펴는가?
이봉현 미디어 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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