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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한국이 모르는 일본] (4) 화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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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막부 도박금지령에, 화투는 숫자 대신 사계절을 품었다

경향신문

청단과 홍단을 담은 일본의 하나후다와 한국의 화투. 위로부터 20세기 초기의 하나후다, 현재 닌텐도에서 제작해 시판 중인 하나후다, 20세기 초중반 일본에서 하나후다와 트럼프를 모두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카드, 현재 한국에서 널리 판매되고 있는 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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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화투놀이를 할 줄 모른다. 아시다시피 화투에는 트럼프처럼 숫자가 써 있는 게 아니라, 일 년 열두 달의 상징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화투패가 몇 월을 가리키는지 외워지지가 않으니, 화투 게임에서 어떻게 점수가 계산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화투의 원형은 유럽의 트럼프다. 그런데, 왜 화투에는 트럼프처럼 알기 쉽게 숫자가 써 있지 않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18세기 말 일본의 정치적 사건이 있다. 술을 못 마시는 술 감별사와 마찬가지로, 화투놀이를 못하는 필자가 바라보는 화투의 역사에도 독특한 맛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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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들이 소원을 적어 걸어놓는 단자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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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인들이 즐기는 화투(花鬪)는 ‘꽃싸움’ ‘꽃놀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화투는 19세기 초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유행한 ‘하나후다(花札)’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첫번째 사진을 보면 위에서부터 차례로,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하나후다, 현재 닌텐도에서 판매하는 하나후다, 20세기 초중반에 하나후다와 트럼프를 합쳐서 두 가지 게임을 한꺼번에 할 수 있게 고안된 카드,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화투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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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플로레스가 만든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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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닌텐도는, 세계적인 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만든 그 닌텐도가 맞다. 닌텐도의 출발은 화투였고, 비록 사업 다변화, 사업 현대화라는 목표로 컴퓨터 게임 시장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민속놀이용으로 화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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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트럼프를 일본화한 덴쇼카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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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첫 번째와 두 번째 하나후다는 모두 종이로 만들어졌다. 이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나이 있으신 청중께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자기도 종이로 만들어진 화투를 가지고 놀았다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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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카드 덴쇼카루타의 일종인 운슨카루타.


원래 화투는 일본과 가까운 부산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유행했으며, 서울·인천·군산 등 한국의 서북부 지역에서는 마작이 인기를 끌었다는 증언이 많다. 그러다 1980년대에 화투의 인기가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 서울·경기 일대로 북상(北上)하면서 전국구 놀이가 되었고, 급격한 수요 증가를 따라잡기 위해 플라스틱 화투가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마작은 점차 세력이 축소되어, 2014년 한국의 마지막 마작 업체인 인천의 ‘천일사’가 폐점했다(차지은 ‘인천 마작역사의 마침표’, 인천미디어 884호). 필자는 명동의 화교 가게에서 중국산 마작패를 사서 연구실에 장식해 두었다. 당연히, 화투보다 훨씬 복잡한 마작도 할 줄 모른다. 그저 재미로 바라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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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덴쇼카루타의 곤봉 문양이 독립된 형태로 변화한 가부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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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00년이라는 시간과 일본·한국이라는 지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보이는 네 종류의 하나후다 및 화투는 놀랄 만큼 그 형태나 크기가 유사하다. 여기서는 한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홍단’과 ‘청단’이 들어간 월(月)만 골라서 나란히 놓았다. 한국 화투의 ‘홍단’과 ‘청단’은 일본 하나후다에서는 ‘적단(赤短)’과 ‘청단(靑短)’이라고 한다. 이는 ‘적단책(赤短冊)’과 ‘청단책(靑短冊)’의 줄임말이다. 붉은 단책과 푸른 단책이라는 뜻이다.

‘단책’은 일본어로는 ‘단자쿠’라고 읽는데,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를 적을 수 있게 고안된 노트를 말한다. 칠월칠석에 일본에 가본 사람들은, 상점가 곳곳에 대나무가 길게 장식되어 있고, 소원을 적은 단자쿠를 이 대나무에 걸어놓은 풍경을 봤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아빠 돈 많이 벌어오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단자쿠에 적은 데에서 세태가 느껴진다, 라는 뉴스가 매년 흘러나오곤 한다.

하나후다를 보면 1월과 2월 적단에는 ‘아카요로시(あかよろし)’, 3월 적단에는 ‘미요시노노(みよしのの)’라고 적혀 있다. ‘아카요로시’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매우(아카) 좋다(요로시)’는 뜻의 옛말인 것 같다. 그런데, ‘아카’라는 단어에 ‘붉다(赤)’라는 뜻도 있다보니 ‘적단’에 쓰이게 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편, ‘미요시노노’란 ‘아름다운 요시노 산(山)의 벚꽃’이라는 뜻이다. 요시노 산은 예로부터 벚꽃의 명소다.

‘아카요로시’ ‘미요시노노’와 같은 하나후다의 일본어가, 화투에서는 ‘홍단’이라는 글자로 바뀌어 있지만 옛 히라가나 필체를 모방해서 흘림체 한글로 적혀 있다. 그리고, 하나후다의 ‘청단’에는 일반적으로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지만, 화투의 청단에는 홍단에 맞추어 ‘청단’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하나후다와 트럼프를 합친 것이 하나후다의 본고장 일본에서 발생한 변형이라면, 와카 문구가 ‘홍단’이라는 한국어로 바뀌고 ‘청단’이라는 한국어가 추가된 것은 한국에서 발생한 변형이라 하겠다.

하나후다에 그려진 풍경은 각각 1월 소나무, 2월 매화, 3월 벚꽃, 4월 등(藤)나무, 5월 창포(菖蒲), 6월 모란(牡丹), 7월 싸리(萩), 9월 국화, 10월 단풍, 12월 오동(桐)이다. 한국에서는 4월의 식물을 ‘흑싸리’라고 해서 아래에서 위로 자라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이 식물은 등나무이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놓여야 한다. 한국에서는 5월의 창포를 난초라고 하는데, 과연 예로부터 난초 좋아하는 한국인들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일본 하나후다에서는 11월이 버드나무 또는 비(雨), 12월이 오동인데, 한국 화투에서는 11월이 오동, 12월이 비로 되어 있다. 이렇게 바뀐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또 한국에서 11월을 속칭 ‘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동’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사계절이 카드패에 담기게 된 것은 1780~1790년대에 일본에서 실시된 간세이 개혁(寬政の改革) 이후다. 17세기부터 1868년까지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는 크게 세 차례의 전국적 개혁을 실시했다. 간세이 개혁은 18세기 전기의 교호 개혁(享保の改革)과 19세기 전기의 덴포 개혁(天保の改革) 사이에 위치한다. 개혁 정치를 하면 도박 금지는 반드시 하는 법. 막부는 일본 전국에서 유행하던 각종 카드패의 제작을 금지했다. 그러자 카드업자들은 카드에서 숫자를 없애고, 일 년 열두 달의 ‘미풍양속’을 담은 오늘날의 하나후다를 고안해서 개혁의 바람을 피하려 했다.

하나후다의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우키요에(浮世繪)의 화풍(화風)을 단순화한 것이다. 처음에는 게이샤와 가부키 배우, 스모 선수처럼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그리던 우키요에 화가들이 19세기가 되면 풍경 묘사에 눈뜨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우키요에들은 유럽으로 수출하는 도자기의 충진재로 이용되어 ‘일본 열풍(japonism)’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19세기 중기 일본에서는 흔히 ‘왜색(倭色)’이라고 하는 ‘쨍한’ 느낌의 화풍이 탄생한다. 하나후다의 도상은 이 시기의 우키요에 화풍을 닮았다.

그러면 간세이 개혁 전에 유행하던 카드는 어떤 것이었을까? 16세기 중기에 에스파냐·포르투갈 세력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인도에서 이슬람권을 거쳐 유럽에서 그 형태를 갖춘 트럼프도 이들을 따라 일본에 소개되었다. 트럼프가 최초로 일본화한 것을 ‘덴쇼카루타(天正かるた)’라고 한다. 1573~1592년 일본의 연호인 덴쇼에서 딴 것이다. 16세기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플로레스(Francisco Flores)가 제작한 트럼프와 17세기 일본의 덴쇼카루타를 비교하면, 칼·곤봉·컵·동전의 네 가지 문양을 이용하고 있는 기본적인 구도뿐 아니라, 두 카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와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가톨릭 포교를 금지하면서 유럽인들은 일본에서 철수했지만, 그들이 전파한 트럼프는 덴쇼카루타로서 살아남았다. 그 후, 간세이 개혁 때문에 제작이 중단된 덴쇼카루타는 대부분 소멸했지만, 덴쇼카루타의 일종인 운슨카루타(うんすんかるた)와 가부후다(株札) 등은 오늘날에도 만들어지고 있다.

운슨카루타는 규슈의 외딴 동네인 히토요시(人吉)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서, 이 지역의 향토문화로 선전되고 있다. 운슨카루타는 네 가지 문양에 소용돌이 문양을 더하고, 도보 무사, 기마 무사, 여성, 용, 중국 사람(唐人), 복신(福神)으로 나눈 것이다.

가부후다는 트럼프 및 덴쇼카루타의 곤봉 문양이 독립된 것으로, 닌텐도가 하나후다와 함께 제조하고 있다. 유럽인이 일본에서 무역을 하고, 수십만명의 가톨릭 교도가 탄생했으며, 일본 상인들이 태평양을 건너 로마에 다녀오기도 한 중세 일본의 ‘대항해시대’가, 이렇게 규슈 한 구석에서 그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구한말에 일본의 하나후다가 한반도에 전해졌다. 광복 후,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는 식민지 시기의 건물을 부수고 일본어에서 비롯된 단어를 바꾸는 등, 피지배의 기억을 지우는 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일본인의 계절 감각을 한손 안에 들어오도록 만든 하나후다는 화투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특정 직업인들만 하나후다 놀이를 하거나, 명절 때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식으로 그 존재감이 희박해진 상태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정치적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화투의 룰이 만들어지고, 종이에서 플라스틱으로 재질도 바뀌었다. 그뿐인가. 화투를 테마로 한 영화·온라인게임이 잇달아 만들어지는 등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많은 나라에서 널리 행해지는 마작도 화투의 인기에 밀려 한국에서만 시들하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 샹차이(고수나물)와 더불어 마작을 주변 국가들에 비해 한국에서 특히 부진한 세 가지 문화 현상으로 꼽는다.

중세에 유럽 가톨릭 교도들이 일본에 전한 트럼프는, 막부가 유럽인을 추방하고 도박을 금지해도 선풍적 인기를 끈 하나후다가 되었다. 근대에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전한 하나후다는, 광복 이후의 ‘일제 잔재 청산’ 열풍 속에서도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화투가 되었다. 문화란 이런 것이다. 재미있으면 살아남고 재미없으면 사라진다. 연구자들은 그 현상을 기록하고, 다른 문화 현상들과 비교하면서 즐거워한다. 어떤 특정한 문화를 즐기는 것이 정치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논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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