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7 (월)

‘심리전단’ 활동 내용 작성… ‘업무상 문서’ 아니라고?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증거’ 인정 안된 425지논·시큐리티 파일이 뭐기에

경제민주화 비판 등 ‘원세훈 지시’와 대부분 내용 일치

대법, 내용 언급 없이 ‘통상문서’ 증거 형소법 엄격 적용

18대 대선 때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올해 초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64) 사건이 서울고법에서 처음부터 다시 유무죄를 다투게 된 것은 대법원이 핵심 증거였던 텍스트 파일 두 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25지논·시큐리티라는 제목의 두 파일이 증거로 쓰이기 위해선 ‘업무상 필요에 의해 작성한 문서’라는 점이 인정돼야 했지만, 대법원은 형사소송법상 그렇게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두 파일은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개인 e메일 계정의 편지함 첨부파일에서 발견됐다. 대법원은 파일의 어떤 내용과 형식 때문에 업무상 통상문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을까.

경향신문

■ 출처 불분명·사적 내용 포함

2심 판결문 등을 보면 425지논 파일은 파일 이름부터 ‘논지’의 앞뒤 글자를 바꿔 쓴 것으로 추정된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윗선으로부터 그날그날의 이슈와 논지를 전달받고 트위터 활동을 했는데, 이 파일 안에는 ‘금일논지 확산용’, ‘금일집중 확산용’, ‘주말 확산용’ 등 어떤 이슈와 논지를 언제 작성할지 표시돼 있었다. 이슈 제목 밑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설명도 달렸다. 예컨대 ‘제주 복합미항 폄훼활동 대응하기’라는 제목 밑에 그 내용을 설명하는 1~2문장의 논지가 기재돼 있는 식이다. ‘트위터 정지 푸는 절차’라는 제목의 파일 안에는 “팔로잉 2000명 이상부터는 팔로어가 팔로잉의 90% 이상 되어야만 계속적으로 추가해 나갈 수 있습니다” 등으로 관련 절차를 설명하고, 팔로어를 늘리는 방법이나 유용한 사이트도 정리돼 있다.

시큐리티 파일에는 트위터 계정과 그 계정들의 비밀번호, 심리전단 직원들로 보이는 이들의 이름 앞 두 글자와 그에 해당하는 트위터 계정 1~2개가 기재돼 있다. 심리전단은 주로 커피숍 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날짜와 커피숍 이름을 ‘1205 금천 홀리스’, ‘1228 금천 카페베네’로 기재된 일정도 있다. 425지논과 시큐리티 파일의 내용 중 일부는 겹친다.

이렇게 심리전단의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 상세하게 들어가 있었지만, 대법원은 지난 16일 두 파일에 대해 “작성자의 업무수행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라고 하더라도, (두 파일에 포함돼 있는 내용이) 실제 업무수행 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된 것인지 알기도 어렵다”고 판결했다. 업무 외 다른 개인적인 내용도 들어 있고, 다른 직원들 e메일 계정에서 문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도 업무상 문서가 아니라고 봤다.

파일이 발견된 e메일 계정의 주인인 김씨는 작성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시큐리티 파일에는 심리전단 직원으로 구체적 활동을 한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두 파일의) 작성자는 김씨가 맞다”고 판결했다.

■ “비밀 많은 국정원 특성 무시”

업무상 통상문서 등 문서 증거에 관한 형사소송법 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해야 된다는 주장은 그간 진보성향의 법률가나 학계 측에서 많이 제기했다. 이를 폭넓게 해석할 경우 국가보안법 등의 공안사건에서 검찰이 자의적 잣대로 기소를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론적으로만 보면 증거능력에 대한 판단은 대법원처럼 엄격하게 가는 게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석 과정에서 대법원이 비공개 업무가 많은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업무 특성을 얼마나 고려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한 판사는 “국정원의 특성상 업무 관련 문서를 공개적으로 썼을 리가 없다. 안에 신변잡기 등의 내용이 담겼어도 파일 안에 업무와 관련 있는 내용이 있다면 당시 정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비밀스러운 업무 특성과 파일에 담긴 주 내용, 당시 정황 등을 고려할 때 다른 개인이나 일반 회사가 작성한 업무용 문서와 꼭 같은 기준과 형식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하냐는 것이다.

대법원은 425지논·시큐리티 파일의 형식적 반복성이 없다는 것 외에 그보다 더 중요한 그 안의 ‘내용’은 얼마나 업무상 관련성이 있는지, 이 문서가 발견됐을 당시 정황이 어땠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국가기관’의 잘못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를 제출했을 때 흠 하나도 잡을 데 없는 정형화된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