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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한겨레 프리즘] 박근혜가 좋았다 / 김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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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좋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군 이래 최악의 토목공사’라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5년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통령은 그나마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대구 달성군에서 국회의원을 네 번이나 했지만 나는 그가 직접 뭔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가끔 대구에 오면 별다른 말 없이 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동네 한바퀴 돌고 가는 게 전부였다. 대구를 이렇게 살리겠다는 비전이 담긴 인상 깊은 연설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실수를 해서 구설에 올랐던 적도 없었다. 자신이 태어났고 정치적 고향이기도 한 편안한 대구에서조차 그는 ‘논쟁이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에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 한몫했다. 하지만 늘 말과 행동을 아끼는 그의 정치적 스타일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대구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아무 말 없이 웃고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마치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대구에서 아무 말도 행동도 없었지만, 반대로 그의 주변은 시끄러웠다. 2010년 지방선거 때 대구 달성군에는 이변이 일어난다. 박 대통령이 나서 직접 선거운동까지 함께 해준 한나라당 이석원 후보(44.17%)를 누르고 무소속 김문오 후보(47.22%)가 달성군수에 당선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박 대통령을 대신해 달성군을 관리하던 한 측근 때문이었다. ‘누구누구의 불출마를 종용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거만하게 군다’는 등 안 좋은 소문이 퍼지더니 결국 이런 선거 결과가 나왔다. 또 당시 지방선거에서 대구 북구을이 지역구였던 서상기 의원은 기초의원 선거 지원 유세를 하면서 야당 후보를 가리켜 “이 동네에 종북 좌파가 웬 말이냐”고 했다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지거나 실종됐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그답게’ 행동하고 있다. 들끓는 민심과 유족의 비난에도 국무회의와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서만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간접적으로 사과했다. 실종자 가족이 있는 진도와 유족이 있는 안산을 방문하긴 했지만, ‘책임자 엄벌’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박 대통령의 주변에서는 역시나 앞다퉈 사고를 치기 바쁘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의 수행원이 실종자 가족에게 “교육부 장관님 오십니다”라고 했다가 비난을 받았고, 안전행정부 국장은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사망자 명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다가 유족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더니, 사고 수습이 한창이던 시기에 정홍원 총리는 돌연 사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여전히 말과 행동을 아끼고 있다.

이처럼 대통령이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니 공무원도 눈치만 보며 언행을 삼간다. 그리고 그 공백은 우왕좌왕하는 행정과 높으신 분들의 해프닝이 메운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가능한 한 빠르게 실종자들을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생각해내라”며 진두지휘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과연 대통령제 국가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와 철학을 담아 무엇인가를 말하고 해야만 한다. 이제 난 이런 대통령이 싫다.

김일우 사회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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