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니 혼(Roni Horn), ‘당신은 날씨다, 2부’, 2010~2011, 종이에 잉크젯 인쇄, 각 26.5×21.4×1㎝, 총 100점. ‘리움 현대미술 소장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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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성미술관 리움에 로니 혼(1955년생)의 사진 작품이 방 하나에 설치되어 있는데, 제목이 ‘당신은 날씨다’이다. 작가는 스무살 무렵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이후, 그곳의 풍광에 매료되어 영감이 필요할 때마다 그곳을 방문했다. 인간을 자연현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오던 그는 1995년에 ‘당신은 날씨다’를 처음 선보였다. 이 작품은 아이슬란드의 자연 온천장에서 한 여성을 촬영한 100장의 초상사진이다. 이번에 전시된 것은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같은 여성을 모델로 똑같이 작업한 두번째 버전의 사진 100점이다.
배경이 나타나 있지 않고, 인물의 표정도 비슷하지만, 환한 날, 찌푸린 날, 축축하고 무거운 날 등 날씨 차이가 미묘하게 느껴진다. 아니, 실제 날씨와 상관없이 그날그날 인물의 감정이나 기분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어제의 나는 흐렸지만, 오늘의 나는 맑고, 내일의 나는 안개가 자욱하여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예외 없이 변화무쌍한 날씨다. “인생은 전부 날씨였다”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 ‘젤리 빈’의 끝 단락에 등장한다. ‘그게 유명한 소설가가 쓴 문장이라고? 내가 한 말인 줄 알았네’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화창했는데, 골프 치러 나온 오늘 아침 하필 빗방울이 떨어지면, 누군가 이렇게 읊어댄다. 골프는 인생이고, 인생은 날씨지 뭐.
인생을 날씨에 비유하는 건, 굳이 피츠제럴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평소 대화하다가 종종 듣게 되는 익숙하고 싱거운 클리셰(cliche)다. 진부한 표현이라는 뜻의 클리셰는 옛 인쇄업자 사이에서 쓰던 은어로 ‘클릭’(click) 소리에서 유래했다. 인쇄용 연판을 제작할 때 활자의 자모가 녹은 부분에 금속이 떨어지면 그 소리가 난다고 해서, 클리셰는 닳아버린 활자 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클릭은 요즘엔 검색하고 조회하는 행위로 통한다. 다수가 너무 자주 조회하면 참신함은 곧 사라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인생은 날씨라는 클리셰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또 줄을 긋고 마는, 미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피츠제럴드처럼 ‘인생은 전부 날씨였다’ 하고 과거시제를 쓰면 좀 더 짙은 여운을 남긴다. 스스로 계획한 대로,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없었다는 회한의 뉘앙스가 깃들기 때문이다. ‘젤리 빈’은 1896년생 피츠제럴드가 24살 때인 1920년에 발표됐다.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남부로, 특별한 목표나 야망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젤리 빈이라는 별명을 가진 청년, 짐 파월의 이야기이다.
짐은 변변한 재능은 없지만, 우연에 의존하는 주사위 던지기만큼은 천재적이다. 그 장기로 흠모하던 여자의 환심도 잠시 얻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것은 세상에 없고, 사랑도 그저 한낮의 열기와도 같을 뿐이라는 것을, 오후 3시 달아오른 온도 속에서 문득 깨닫게 된다. 이때 나오는 문장이 “인생은 전부 날씨였다”이다. 여기서 짐의 태도는 ‘다 내려놓음’은 아니다. 날씨가 마치 우리에게 삶의 교훈이라도 주는 것 같지만, 그건 단순한 변덕일 뿐 사실 거기에는 아무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는 발견이다. 전후 황량해진 세상에 홀로 내팽개쳐진 ‘상실 세대(Lost Generation)’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날씨 때문에 좌절하여, 또는 다가올 날씨 눈치 보면서 제대로 뭘 못 하며 살 것인가? 자신을 내세우고 방어할 굳건한 갑옷도 걸치지 못한, 영양가 없이 말랑말랑한 젤리일 뿐이지만, 그냥 나를 믿고 세상을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거다.
날씨가 유독 직접적으로 어부 가족의 생계 또는 해녀 가장의 생명과 얽혀 있던, 반세기 전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가 최근 인기를 끈다. 주인공 애순이와 관식이 부부가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태풍이 몰아치고, 그 혼란 속에서 막내를 잃는다. 둘은 슬픔에 젖어 몸을 일으킬 의지도 없지만, 그래도 남은 두 아이를 보며 다시 일어선다. 살기로 하고 살면 살아진다. 물론 다 잊은 건 아니다. 어제의 내가 겪은 날씨는 어제의 일로 접어두고 오늘의 나로 사는 거지, 무작정 운명의 장난에 순응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8화까지 본 상태에서 이 글을 쓰는데, 인생은 매 순간 날씨였고 전체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다는 게,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인 듯하다. 클리셰이지만, 9화를 기대하며 퇴근을 서두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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