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밤 10시께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투쟁사업장 오픈마이크’ 행사. 고나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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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파면 매일 긴급집회’가 마무리된 17일 밤 10시께, 늦어지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에 분노한 시민 함성이 잦아들고 한적해진 광장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지 않은 날도 다가오겠죠. 내가 말해줄게요. 당신과 함께할 거라고. 우리는 각자 다르지만 여기 이렇게 기다릴 거라고.”
소수자와 함께하는 투쟁펑크밴드 ‘소수윗’의 보컬 백승이씨가 투쟁가 ‘여기 이렇게’를 부르자, 그를 둘러 싼 시민 30여명이 박자에 맞춰 ‘우리나라 정상영업합니다’, ‘핼로해피 웃음꽃피우기모임’, ‘야구로만 화내고 싶은 전국 야구팬 모임 연합’ 등이 써진 깃발을 흔들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 여전히 집에 가지 못한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열린 ‘투쟁사업장 오픈마이크’ 행사였다.
윤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광화문 서십자각 주변 ‘텐트촌’에 공동농성장을 연 ‘세종호텔정리해고철회공대위’,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에이(A)학교 공익제보교사 부당전보철회공대위’,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등은 지난 10일부터 비상행동 집회가 끝난 밤 9시30분부터 시민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오픈마이크’ 자리를 만들었다. 18일부터는 긴급 집회가 시작되기 전 매일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광화문 누각 주변에서 열린다.
이곳 시민들의 대화 주제는 농성 중인 노동자다. 최장기 고공농성을 진행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 박정혜·소현숙,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마찬가지로 고공농성 중인 세종호텔 노동자 고진수, 원청업체인 한화오션의 합의사항 이행 촉구를 요구하며 철탑에 오른 조선소 하청 노동자 김형수, 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공익 제보했다는 이유로 전보된 지혜복 교사 등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때로 전화 연결로 고공에 있는 ‘동지’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웃는다.
“저는 반도체 전공자였습니다. 전공을 그만둔 지 오래라 반도체에 대해, 반도체특별법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얼굴 모르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삶에 대해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 저는 얼마 전 방진복을 입고, 반도체 노동자의 영정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이날 오픈마이크에서 발언에 나선 한 시민은 지난 6일 ‘고 황유미 18주기 추모 및 반도체 특별법 폐기 결의대회’에 참여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행진을 마치고 집에 가서 (반도체 산업 종사자의 주 52시간 적용 제외 등의 내용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과, 반도체 제작과정의 위험성,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고 황유미 노동자에 대해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함께 배우고, 함께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자”는 그의 고백에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냈다.
광장을 지나가다가 반도체 특별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이날 오픈마이크에 참석했다는 나아무개(29)씨는 “많은 노동자가 내가 모르는 투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노동자 인권, 차별금지법 이야기가 나왔는데 흐지부지됐다. 이번만큼은 내란범 청산뿐만 아니라 사회의 차별을 철폐하고 노동자가 죽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나갔으면 한다”고 했다.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아란(24)씨도 “비상행동 집회가 끝나고 광장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오픈마이크가 들어서서 발언을 들어보다 계속 참여하게 됐다”면서 “누군가에게는 ‘사회대개혁’이 윤석열을 퇴진시키고 정권을 잡는 것에 있을 수 있겠지만, 탄핵 이슈에 묻힌 약자들의 목소리를 얘기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두운 밤, 광장의 한쪽, 적은 인원, 무대 없이 발언자와 시민들이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는 ‘오픈마이크’는 대규모 집회에서 미뤄뒀던 말들을 되짚는 자리이기도 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시민들이 “윤석열은 감옥으로, 고진수는 땅으로, 박정혜·소현숙은 밑으로, 김형수는 거제로”라는 구호를 외친 뒤, 마이크를 잡은 이지완(31)씨가 말했다.
“저는 이 오픈마이크 행사가 좋고, 없으면 허전합니다. 이곳에 오면 지난 3개월 동안 광장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동지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감성적인 이유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자리가 최악과 차악의 권력 다툼에서 구석으로, 나중으로 , 뒤로 , 배제되고, 소외되고, 밀려난 말들이 결국 온 사회를 뒤덮는 파도가 되어 밀려올 것임을 보여주는 자리라 좋습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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