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상징 ‘조선신궁’과 함께 개장… 9000평 육상경기장 등 규모 상당해
日 경기대회 ‘조선 예선’ 치러졌으나 조선인 출전 늘며 민족적 경쟁場 돼
태평양전쟁 때 군사훈련장으로 전락… 2008년 ‘83년 역사’ 뒤로하고 철거
일제강점기인 1925년 경성운동장으로 개장해 2008년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은 비단 한국 근현대 스포츠의 메인스타디움만은 아니었다. 한일 간 민족적 경쟁의 장이기도 했고, 일제 군사훈련장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경성운동장에서 육상 경기를 하는 모습. 국립중앙도서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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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의 변천사
2008년 5월 14일 서울시는 철거를 앞둔 동대문운동장에서 ‘굿바이 동대문운동장’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는 서울시장과 홍명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당시 한국올림픽축구대표팀 코치), 고 유상철 전 인천 감독(당시 선수) 등이 마지막으로 축구공을 차는 ‘굿바이 킥’에 이어 운동장 북쪽의 전광판을 철거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으로 개장해 광복 후 서울운동장을 거쳐 1980년대 잠실 올림픽경기장이 새롭게 들어설 때까지 근 반세기 이상 한국 근현대 스포츠의 ‘메인스타디움’ 역할을 했던 동대문운동장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대체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도인 경성에 변변한 종합경기장 하나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19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체육협회, 1920년 조선인 중심의 조선체육회가 차례로 조직되고 몇몇 종목의 대회도 열렸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아 주로 학교 운동장 등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일언코자 하는 바는 이러한 전 조선을 망라한 대운동회가 자주 개최되는 수부 경성에 일개의 상당한 운동장이 없어 기다(幾多)의 불편을 느끼게 됨은 경성을 위하여 치욕”이라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24년 11월 22일)
마침 1923년 일본 왕세자(후일 히로히토 일왕)의 결혼이 발표되면서 각지에서는 기념 사업을 계획했다. 이를 기회로 경성부는 종합경기장 건설안을 내놓았다. 장소는 광희문과 동대문 동쪽 훈련원공원 부지를 예정했다. 훈련원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훈련관으로 설치한 군사훈련기구다. 조선 세조 때였던 1466년 훈련원으로 개칭했다. 이후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면서 훈련원은 기능을 잃고 공원처럼 이용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공식적으로 ‘훈련원공원’으로 지정됐다. 경성부는 이미 “훈련원은 지면이 평탄하고 또 면적이 넓어서 시민의 운동장으로 장래에 크게 필요한 지점이므로 부 당국에서도 역시 운동장으로 필요한 설비를 할” 구상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동아일보, 1921년 4월 28일)
경성운동장 평면도(경성일보 1925년 5월 30일자). 국립중앙도서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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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초 종합경기장 건설 계획이 확정되자 설계를 맡은 경성부 기사 오모리 쓰루키치(大森鶴吉)는 여러 달에 걸쳐 외국의 자료를 수집하고 도쿄의 메이지신궁경기장, 오사카 부근의 고시엔구장 등을 시찰 조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25년 5월 정식 기공한 경성운동장의 규모는 상당했다. 총 2만3000여 평 면적에 예산은 15만5000원으로 책정했다. 가장 큰 부분은 9000여 평의 육상경기장이었다. 500m 트랙과 각종 던지기, 높이뛰기, 멀리뛰기 경기장 등을 포함했으며 필드는 축구장도 겸하도록 했다. 그다음으로 큰 곳은 야구장으로 6000여 평 넓이에 중앙펜스 111m, 좌우펜스 108m의 규모로 조성됐다. 여기엔 ‘전기장치’로 스코어와 볼카운트를 표시하는 보드까지 시설했다. 이 외에도 정구장, 수영장, 승마장 등을 계획했다. 5000여 평은 녹지로 남겨둬 공원 기능을 계속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매년 열린 조선신궁 경기대회는 사실 도쿄에서 열리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의 ‘조선 예선’이었다. 일본인 중심 반관반민의 조선체육협회가 주도했기 때문에 조선체육회 측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별적인 조선인 팀의 참여는 있었다. 제1회 대회부터 배구와 농구는 조선인 팀이 우승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인의 출전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경기에 출전하려면 좋으나 싫으나 관이 주관하는 ‘공식대회’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도 1934년 조선신궁 경기대회 5000m에서 우승한 데 이어 이듬해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를 우승함으로써 올림픽 출전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성운동장만 한 경기장을 찾기는 어려웠다. 조선체육회는 조선신궁 경기대회에 대항해 육상, 야구, 정구, 축구 등 여러 종목의 ‘전조선 대회’를 개최했다. 사립학교 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사용하다 보니 불편함이 컸다. 그리하여 점차 전조선 대회도 경성운동장에서 개최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인 스포츠 스타도 탄생했다. 조선어 언론은 1928년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한 야구경기를 대서특필했다. 구락부 야구전 연희전문학교 대 경성의학전문학교 경기에서 “경성운동장 개설 이래로 정규의 담장을 넘어가는 대본루타(大本壘打· 홈런)를 친 초유의 기록을 조선인이 지었”기 때문이다. 연희전문의 이영민 선수였다. 그는 “제일회에 이사후 제이구 인코-너를 스코어판장(板墻)을 넘겨서 본루에서 370척을 거리한 판을 넘겨 낙구했다.” 개장 이래 3년간 일본인이 한 번도 넘기지 못한 경성운동장 중앙펜스를 조선인 선수가 넘긴 ‘쾌거’였다.(동아일보, 1928년 6월 10일)
경성운동장 수영장(매일신보 1937년 6월 21일자). 국립중앙도서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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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들어 경성운동장에는 새로운 시설이 추가됐다. 바로 수영장이다. 이미 1925년 설계에 수영장이 포함돼 있었으나 예산 부족으로 공사를 미룬 것이었다. 1934년 6월 준공한 수영장은 조선 최초로 50m 레인까지 시설했다. 그 밖에 다섯 종류의 3∼10m 다이빙대를 설치한 다이빙 전용 풀, 아동용 수영장 등을 갖췄다. 수영장은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개장하자마자 7월 한 달간 수영장 입장객은 7000여 명이나 됐다(매일신보, 1934년 8월 9일). 이듬해부터는 한여름인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 매주 월요일을 ‘여성 전용일’로 정해 남성 입장을 금지하기도 했다.(조선중앙일보,1935년 7월 20일)
이렇듯 조선을 대표하는 종합경기장이자 경성부민의 위락시설, 조선인과 일본인 간 미묘한 민족적 경쟁의 장이었던 경성운동장의 성격은 일제가 침략전쟁을 도발하면서 바뀌어 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사실상 군사훈련장이 된 경성운동장의 풍경은 이러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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