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에서 시설 오이를 재배하기 위해 이모씨(36)가 구입한 땅이 휑하게 비어 있다. 청년 농부를 위한 대출 사업(후계농업경영인 육성자금)에 선정되지 못한 이씨 부부는 진행하던 비닐하우스 농사를 일단 중단했다. 후계농 자금지원 중단사태 긴급 간담회 자료집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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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전사령부(특전사) 군인이었던 이모씨(36)는 2022년 아내와 귀농을 결심했다. 잦은 이사와 훈련으로 가족들과의 시간이 적었던 터였다. 이씨는 제대 후 충북 진천에서 시설를 짓고 오이를 재배하며 새 삶을 살고자 했다. ‘청년영농정착지원사업(지원사업)’은 부부에게 귀농할 결심을 굳힌 정책이다.
농지와 비닐하우스 등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데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농업은 청년들이 진입하기 어려운 분야다. 정부는 그 문턱을 낮추기 위해 2018년부터 지원사업을 펴왔다. 이 사업에 선발된 청년 농부는 월 90만~110만원 상당의 생계비를 3년간 지원받는다. 농업 투자금을 1.5% 금리(또는 변동금리)로 최대 5억원까지(5년 거치 20년 상환) 대출받을 수도 있다.
지원 대상은 영농계획과 교육 이수 시간 등을 검토해 까다롭게 선정된다. 이들은 선발된 해로부터 5년 안에 대출을 신청할 수 있는데, 해마다 자금이 소진될 때까지 선착순으로 접수가 이뤄졌다. 저마다의 농업 계획에 따라 ‘원하는 때’ 신청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이씨 부부는 착실히 준비해 2024년 지원 대상자로 선발됐다. 그해 5월엔 농지를 사들였다. “남은 퇴직금에 대출을 더해 비닐하우스를 지으려 했어요.” 이씨가 23일 통화에서 말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8월, 이씨가 자금을 신청하자 ‘한 해 예산이 다 소진돼 대출이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청년 농부 이모씨(36)가 지난해 12월27일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농신보) 충북 센터로부터 받은 ‘보증 승인’ 문자. 후계농 자금지원 중단 사태 긴급 간담회 자료집 갈무리 |
이씨 부부는 초등학생과 6살짜리 두 자녀를 키우며 2025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올해 대출 신청을 받자마자 접수했다. 농협과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농신보)에서 보증 승인도 받은 터라 당연히 대출이 나오겠거니 했다. 그런데 수년간 대출이 선착순으로 결정되던 것과 달리, 정부는 올해부터 ‘추가 심사를 거쳐 대출을 승인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올해 1월, 이씨는 ‘배정 미선정’ 결과를 통보받았다. 이씨만이 아니었다.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농림축산식품부에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신청자 3845명 중 약 74%(2863명)가 심사에서 탈락했다.
정책 대상 선정 방식이 갑작스레 변경되며 청년 농부 2000여명은 ‘농사를 포기할 것이냐’ ‘고금리의 빚더미를 끌어안을 것이냐’는 갈래길에 놓였다. 원성이 빗발치자 정부는 지난 19일 부랴부랴 자금 지원 규모를 기존 6000억에서 1조500억원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계약을 이미 체결했으나 배정을 받지 못한 청년들을 조사하고 2월 중 대출이 실행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청년들은 “여전히 불안하다”고 말한다. 추가 지원 역시 ‘심사를 하겠다’는 기조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2022년 경북 한 지역에서 화훼 농가를 시작한 박모씨(38)는 올해 자금을 대출받아 비닐하우스를 짓고자 했지만 지난 1월 선정 대상에서 탈락했다. 박씨는 대구에서 11년간 실내 조경용 식물을 취급하는 꽃집을 운영하다가 농부의 길을 걷게 됐다. 농원을 운영하는 지인들로부터 이 지원 사업을 소개받으면서다. “정부의 대출 지원으로 농사 기반을 마련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가족에게 물려받은 땅 없이 맨몸으로 농사를 시작해야 했던 박씨는 대출 지원이 ‘유일한 믿을 구석’이었다고 말한다. “수년간 지속해 온 사업이니 믿고 농촌에 내려왔는데 지금은 후회가 막심합니다.”
경기 양평에서 애플망고 농사를 시작하려는 김병연씨가 자신의 애플망고 온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
지난해 경기 양평에 귀촌한 김병연씨(34)는 늘어난 예산에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애플망고 농사를 지을 예정인 그는 시설 하우스 및 전기 난방 잔금 약 3억6000만원을 다음달 28일까지 상환해야 한다. 그는 “잔금을 안 치르면 계약서상 매일 가액이 되는 터라 마음이 급했는데, 추가 대책을 보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작물만 기르면 되는 상황에 갑자기 대금을 못 치르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김씨가 말했다. 그는 정책자금 대출이 ‘지원’이긴 하지만 여전히 거액을 빌리는 일인 만큼 청년 농부들이 기준을 맞추고, 돈을 상환하기 위해 성실히 노력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정부와 청년 농부 사이의 믿음을 뒤흔든 이번 사태는 그에게도 상흔을 남겼다. 김씨는 “농촌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만, 이번 사건으로 ‘청년 농부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건 어려운 일인 건가’ 회의감도 들었다”고 했다.
청년 농부들은 불안함 속에서 이번 명절을 날 전망이다. 김씨는 “일 처리가 더디게 느껴져 명절이 긴 것이 불안하다”며 “믿고 손 놓고 있다가 또 정부의 방침이 바뀌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고 했다.
☞ [세상 읽기]‘농업판 전세사기’ 뒤통수 맞은 청년농민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232125005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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