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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침을 뱃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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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의 가장자리 톡]

노컷뉴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



동네 재래시장에서 폐업을 앞둔 속옷 가게를 만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게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유리문에 이런 글자가 붙어 있다.

<폐업 50% 반깝>

사람들이 '반값'에 나온 팬티나 메리야쓰 보다 '반깝'에만 눈길을 주고 있다. '반깝'이면 어떻고 '반값'이면 어떤가. 알아들으면 되지…… 가게 사장님이 국어시험 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큰둥한 생각을 하는데 불쑥 낯이 뜨거워졌다. 감추어 둔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나에게도 <폐업 50% 반깝>과 다를 것이 없는 <침을 뱃지 마시오!>의 속 쓰린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곳은 충청북도 최남단에 있는 영동군의 시골 면 소재지였다. 특이한 것은 이곳이 시골인데도 국민학교와 중학교, 상업고등학교가 있었다. 우리 집은 그들 학교로 발령받아온 교사들의 하숙집이었다.

어느 날 우리 집 재래식 변소 문 안쪽, 그러니까 볼일을 보려고 쭈그리고 앉으면 정면에 보이는 나무문짝에 이런 글자가 붙었다.

<침을 뱃지 마시오!>

그걸 보는 순간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찔했다. <뱃다> 라는 낱말 때문이었다. <뱉다>로 고쳐야 맞았다. 보나 마나 이 글씨를 써서 붙인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둘러앉은 하숙생들이 킥킥거렸다. "뱃다가 아니라 뱉다로 써야 맞잖아유?" 체육 선생이 국어 선생에게 묻는다. "선생님은 체육을 가르치는데도 잘 아네유. 시옷이 아니라 티읕이 맞아유." 국어 선생이 잘난 척 부연 설명을 한다.

아버지는 저만치 떨어져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아버지는 하숙생들이 킥킥거리며 주고받는 말이 자신의 무식을 비웃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인지…… 도대체 듣는 것인지 안 듣는 것인지 묵묵부답 텔레비전에 일심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변소에 붙어 있는 경고문은 바뀌지 않았다. 똑똑한 하숙생 선생들의 지적에도 꿋꿋하게 붙어 있었다. 하루는 누군가가 '뱃' 자 위에 빨간 볼펜으로 엑스를 그어 놓았다. 나는 변소에 들어갈 때마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붙여 놓은 것을 내가 떼 낼 수도 없었다. 혹여 하숙생 가운데 누가 떼버린 걸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왜 이리 고집이 센 건가?

그걸 이해하게 된 것은 세월이 흘러 철이 들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국어 교사인 하숙생의 지적을 듣고도 '뱃다'가 왜 '뱉다'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거다. '뱃다'가 철자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뱉다'로 고쳐 써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준 하숙생도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내가 어찌 아버지를 가르친단 말인가?

<침을 뱃지 마시오!>는 한 달 동안 붙어 있다가 어느 날 사라졌다. 아버지가 교사 하숙생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변소 바닥에 더러운 침을 뱉지 말라는 것이었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교사들이여, 똥 누면서 바닥에 침 좀 뱉지 마시오"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침을 뱉지 말아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은 어디로 가고, 낱말의 맞춤법이 틀린 것 때문에 판세가 바뀐 것이니…… 침을 뱉지 말라는 아버지의 부탁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로 끝난 셈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곧 문을 닫게 될 재래시장 속옷 가게 사장님도 '반깝'은 알지만 '반값'은 모른다. 배우지 못했거나 세파에 시달리다가 까먹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사장님에게는 '반깝'이 '반값'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반값'은 모르지만 '반깝'으로도 잘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뱉다'를 모르고도 '뱃다'로 잘 살아온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속옷 가게의 '반깝' 앞에 걸음을 멈춘 사람들은 자기는 '반값'을 안다는 것에 안도하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반깝'으로 알고 살아가는 가게 사장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철자가 틀렸지만 그 낱말이 전하고자 하는 뜻과 주인의 마음과 상황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반값'을 안다는 것에만 안도했지, '반깝'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침을 뱃지 마시오!'라는 아버지의 호소에 당신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뱉지'를 모르는 주인을 비웃는다. 그리고는 오늘도 여전히 침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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