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이 된 러닝셔츠, 〈다이하드〉
영화 '다이하드'에서 러닝셔츠를 입고 있는 브루스 윌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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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역사와 전통을 중시한다. 그런 연유로 연말 시즌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는 풍습을 유년 시절부터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말 다시 만난 ‘다이하드’(1988)의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을 보면서 가장 반가웠던 건 요즘 남자의 옷장에서 사라져가는 순면 러닝셔츠였다.
1988년 48국에서 개봉한 다이하드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액션 자체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나름 시대정신을 담아낸 작가주의 작품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인들은 지금처럼 강한 미국을 원했다. 영화 속 롤렉스와 새빌로 슈트로 대표되는 고급 라이프스타일 분야는 유럽에 밀리고, 기술 산업 분야에서는 영화 속 공간인 나카토미 플라자나 터치스크린과 같은 첨단 기술로 상징되는 일본 자본에 바짝 쫓기던 시절이다. 여권이 신장되면서 사회 분위기도 크게 변모할 때다.
그런 이때,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LA에 떨어진 뉴욕 형사 존 매클레인은 카우보이 모자 대신 흰 러닝셔츠를 입고 나타난 현대판 카우보이였다. 꽤나 피곤해질 역경이 닥칠지라도 유머와 여유로 승화하며 결국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지켜낸다. 그러니까 존 매클레인은 국가와 가정을 수호하는 뉴욕 경찰의 페르소나와 낭만적인 카우보이의 남성성이 결합해 탄생한,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주창하던 강력한 미국을 되찾은 영웅이었다. 그것도 람보나 스티븐 시걸 같은 살인 병기가 아니라 체크 셔츠에 흰 순면 러닝셔츠를 받쳐 입는 중산층 노동자 계급의 전형을 한 ‘보통 남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1988년작 '다이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입었던 러닝 셔츠.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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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영웅이 된 보통 남자를 상징하는 다이하드의 러닝셔츠는 누구나 쉽게 사는 대량생산 속옷에서 유명 영화 의상 디자이너의 손길이 깃든 영화 의상으로, 2007년부터는 미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는 공식화된 현대 유물이자 남자의 물건으로 3단 승격했다.
시대가 변해도 순면 러닝셔츠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피부 때문만이 아니다. 만약 유럽 테러리스트 일당이 쳐들어왔을 때 브루스 윌리스가 유니클로의 살구색 에어리즘이나 검정 히트텍을 입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난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켜내고 관계를 회복하는 이 크리스마스 영화에서 흰 러닝셔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남자라면 언제든지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점과 기술이 어떻고 시대가 어떻든 자기만의 근본을 지켜가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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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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