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10 (금)

‘항명이여, 만세’ [말글살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해병대 채수근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항명과 상관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1심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말은 계엄 포고령을 닮았다. 꿈틀거리는 세계를 압정 같은 기호로 못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 잔소리 말고 따라 하라고 한다. 총부리를 닮은 말의 질서, 포승줄을 닮은 명령의 체계. 벗어날 수 없다. 나무를 ‘나무’라 불러라, 하늘을 ‘하늘’이라 불러라. 시키는 대로 따르면 이 땅에서 ‘살게’ 해 주마. 벌거벗은 우리는 이 말의 질서에 포박되어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우리 주변에 불합리와 부조리와 부당함이 무수하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어디 한번 대들어 보았던가. 나처럼 계산 빠르고 잇속에 밝은 사람은 할 수가 없다(예쁘구나,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야. 대견하구나, 시킨 일을 해내는 너는 능력자). 안주머니에 따뜻한 지폐가 쌓일수록 항명은커녕 찍소리도 못 하며 현실에 안주한다. ‘좋은 게 좋은 거야.’ ‘튀지 마.’ 헛기침을 하고 먼 산만 쳐다보며, 물러서고 주저앉는다.



‘항명’(抗命)에 쓰인 ‘명’은 ‘명령’의 명이지만, 자꾸 ‘운명’의 명으로 읽힌다. 명령을 어기는 일은 자신의 운명도 거스르는 일. 새로운 운명을 초대하는 일. 지금 당도한 말(명령)에 대한 거역이고, 말 뒤에 숨은 권력(힘)에 맞서는 일이라 어찌 위험하지 않으리. 한 치 앞을 모를 허허벌판으로 나선다.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진다.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새 세상은 항명에서 온다지. 항명은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한 거부. 유일한 질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 ‘한통속’에서 삐져나오는 파열음. 명령을 어기고 치받고 거역하고 대들고 뻗대는 사람들이 새 세상의 맨 앞줄에 선다. 크고 작은 항명이 모여 세상은 전진한다. 반역의 시대, 항명은 민주주의를 낳는다. 무수한 항명을 존경한다. 그리하여, 타는 목마름으로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항명이여, 만세.’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