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손숙, 부부로 연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오늘 개막
연기 경력 60년이 넘는 두 배우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처음 무대 위에서 만난다. 서울 대학로 한 연습실, 남편 ‘윌리’ 박근형은 큰아들의 미식축구 경기에서 흔들던 응원 깃발을, 아내 ‘린다’ 손숙은 극중 끊임없이 들고 나르는 빨래 바구니를 들고 활짝 웃어 보였다. /박상훈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어느 삶이라고 크게 다를까.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키워드>의 주인공 ‘윌리 로먼’은 화목한 가정을 일궈보겠다고 평생 출장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아내 ‘린다’는 스타킹을 기워 신으며 남편을 기다리고 두 아들을 키운다. 길고 고단한 여정의 끝에 뭐가 있을지, 가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것이다.
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하는 ‘세일즈맨의 죽음’에선 각각 무대 경력 60년이 넘는 박근형(85)과 손숙(81) 두 배우가 처음으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다. 남편 ‘윌리’와 아내 ‘린다’ 역. 두 사람이 무대 위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상상만으로 관객의 마음은 벌써 애틋하다. 최근 서울 대학로 연습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두 달 넘게 연습을 하는데 오래 함께해온 듯 편안하다”며 웃었다. 두 ‘연기 달인’에게 아서 밀러 같은 고전 정극은 눈빛만으로도 손발이 척척 맞을 ‘홈 그라운드’다.
◇여든 넘겨도 건강은 “이상 무”
공연 시간 170분. 젊은 배우들도 만만치 않을 긴 연극이지만 두 사람은 자신 있어 했다. 지난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신구 배우와 함께 지방 공연까지 마친 박근형은 “1년여 연극에 묻혀 사니 더 건강해졌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손숙도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연극 ‘토카타’ 이후 많이 좋아졌다. 역시 나이 든 사람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배우들은 죽어도 무대에서 죽고 싶다고 하나 봐요.” 손숙의 말에 박근형이 끼어든다. “아, 죽긴 왜 죽어요. 무대에 누워서라도 연극을 계속해야지!” 두 배우가 해맑게 웃는다. 황반변성을 앓으며 시력이 악화돼 녹음을 들으며 대본을 외우는 손숙은 “들으니까 오히려 읽을 땐 안 보이던 게 보인다”고 했다.
박근형은 네 살 아래인 손숙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한다. 이유를 묻자 “형수님이잖아요” 했다. 손숙의 남편 고 김성옥과 오현경, 이낙훈, 김인태, 김순철 등 배우들이 동부이촌동 인근에 살던 시절,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술이 한 순배 돌면 ‘막내’ 박근형이 옛날 악극단 식으로 ‘나그네 설움’이나 ‘타향살이’ 같은 노래를 곧잘 불렀다. 지금도 원로배우들 사이에서 박근형의 별명은 ‘박카수’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박근형, 손숙 배우가 지난 2024년 12월 3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자유연습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세월에 녹슬지 않은 이야기의 힘
전설적 감독·연출가 엘리아 카잔의 연출로 뉴욕 무대에 오른 지 올해로 75년. 아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윌리는 여전히 참회도 없이 낡아가고, 린다는 그런 남편을 그저 믿고 가족을 뒷바라지한다. 세월이 이만큼 흘러도 녹슬지 않는 이야기의 울림은 불가사의하다. 박근형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공감할 우리 아버지, 우리 가족 이야기”라고 했다. 손숙도 맞장구를 친다. “미국 작품이지만 전혀 미국 얘기 같지 않아요. 우리네 살아온 이야기와 너무 똑같아서.”
2023년 봄 이 연극을 했던 박근형에겐 이번이 “연습도 공연 기간도 짧았던” 초연의 아쉬움을 털어낼 기회다. “가족의 정다운 모습을 더 정답게 표현해달라고 연출가에게 부탁했어요. 그래야 윌리가 격정적으로 변할 때 그 감정의 단차가 더 크게 느껴질 테니까요.” 손숙은 “처음엔 어찌나 까다로우신지 긴장했다”고 했다. “속으로 ‘저렇게 하시는구나, 옛날처럼’ 그랬죠. 치열하게 땀 흘리고 싸우고.”
◇”마음이 아프면 극장으로 오세요”
린다는 일방적으로 남편과 가족에게 헌신하는 어머니. 시대는 변했고 누군가는 답답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손숙이 손사래를 친다. “안 답답해요, 뭘 답답해. 가정을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가꾸는 여자인 걸. 젊을 때도 행복했고, 남편이 늙고 힘들어하고 애들도 잘 안 풀리니까 가슴 아플 뿐이지. 난 현모양처 타입이 못 되지만, 우리 할머니가 그런 분이셔서 익숙해요.” 박근형이 거든다. “가정을 지키고 가족의 사랑이 이어지게 하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전 세계 어디서나 같을 테니까요.”
이번엔 박근형이 “나이 먹고 보니 내가 언뜻언뜻 가부장적으로, 윌리처럼 행동한다”고 하자 손숙이 “전혀 아니다”며 웃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연습 끝나고 같이 차를 타면, 제일 먼저 사모님한테 전화하세요. ‘나, 밥 먹었어. 이제 들어가’ 하고요. 요즘 그런 사람이 누가 있어.”
나라 안팎으로 우환이 많은 시기, 연말연시 모임 취소도 많았다. 손숙은 “극장에 오는 게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이어령 선생님이 그런 말 하셨어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마음이 아프면 극장에 가라’고.” 박근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들께 위로가 되길 바라며 저희는 그저 최선을 다해 연극을 올릴 뿐이지요.” 공연은 3월 3일까지, 4만4000~8만8000원.
☞세일즈맨의 죽음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가 1948년에 쓰고 이듬해 처음 공연한 토니상·퓰리처상 수상 연극. 작가는 이 작품을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목숨을 바치거나 팔아버린 한 남자의 비극”이라고 묘사했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평생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이상적 가정을 이루려 애쓰지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다. 두 아들도 성공하지 못하고, 아버지로도 남편으로도 실패했음을 깨달으며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과거에 대한 몽환적 회상 속으로 빠져든다.
[이태훈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