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 논설위원 |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불안한 기억이 있다. ‘외환위기 트라우마’다. 외환보유액이 39억 달러까지 떨어지며 바닥난 탓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달러 유출로 홍역을 치르다 한·미 통화스와프로 위기를 막았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기억은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은 위기의 신호였고, 외환유출은 경제와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그간 ‘외환 방파제’인 외환보유액 쌓기에 매진했던 이유다.
불안을 동력 삼아 쌓아 올린 한국의 외화 곳간은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던 2021년 10월(4692억1000만 달러) 이후 다소 줄었지만, 지난해 11월 외환보유액은 4153억9000만 달러다. 세계 9위다. 그럼에도 또다시 외환위기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과 대통령 대행에 대한 탄핵 소추 등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서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다. 정부와 당국이 원화가치 방어를 위해 시장 개입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었을 것이란 전망이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다.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가 무너질까 경계 모드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 대응센터에서 관계자가 달러를 정리하는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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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과거에는 3개월 치 수입액을 지급할 수 있는 수준이면 적정하다고 여겼다. 자본거래가 늘면서 3개월 치 경상수입액에 더해 유동외채(만기 1년 이내의 외채)까지 쌓아둬야 괜찮은 수준으로 판단됐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은 가장 빡세다. 거주자 외화예금에 외국인증권투자액 30%까지 포함하다 보니 쟁여야 하는 외환보유액은 훨씬 크다. 대충 따져도 6000억 달러를 훌쩍 넘는다.
외환보유액 부족의 근거로 언급되는 IMF 기준에 따르면 ‘유동외채×30%+기타대외부채(외국인주식투자액)×15%+광의통화량(M2)×5%+수출액×5%’의 100~150%가 적정 외환보유액이다. 2022년 한국은 97% 수준으로 기준을 밑돌았다. 다만 해당 기준은 신흥국에 적용하는 정량평가다. IMF는 2023년 7월부터 한국을 성숙한 시장에 적용하는 정성평가 대상에 포함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도 정성평가 대상인 만큼 정량평가에 따라 외환보유액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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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9위 규모의 외환보유액에도
정국 혼란에 실탄 소진 우려 증폭
정치와 분리된 경제 운영 보여야
물론 외환위기를 막을 수 있는 ‘실탄’이 충분하면 든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외환 방파제를 마냥 높게만 쌓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다다익선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외환보유액은 외화 자산을 사들여 쟁이는 것이다. 외국환평형기금 채권과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외환보유액이 늘어난다는 건 정부와 한국은행이 지급해야 하는 채권 이자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반면 운용 수익은 이자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 안정성과 유동성 확보를 위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낮은 자산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비싸게 돈을 빌려 싼 투자처에 묶어두는 국가적·사회적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다.
거센 파도를 버틸 튼튼한 방파제를 쌓는 일은 중요하다. 사회적 비용을 감수할 충분한 이유다. 하지만 지금 외환보유액이라는 방파제를 뒤흔들고 무너뜨리는 건 밖에서 몰아치는 파도보다 우리 내부에서 만들어낸 거센 파도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충격 그 자체였던 비상계엄으로 상당한 외환보유액의 소진은 피할 수 없었다. 완력을 구사하듯 이뤄진 야당 주도의 한덕수 대통령 대행에 대한 탄핵소추는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환율 상승을 촉발하며 외환보유액을 갉아먹었다.
‘집권’이란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지경인 여당과 ‘수권’ 정당으로서의 책임감도 찾기 어려운 야당의 정치공학적 계산에 외환 곳간은 비어가고, 실제 위기를 막기 위해 써야 할 실탄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조금 과장하면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가 외환위기를 부르고 있다. 정치는 민생을 살펴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다. ‘경제(經濟)’의 어원인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 정치의 요체임에도, 정치가 경제를 인질로 삼은 채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이창용 총재는 “경제만큼은 정치 프로세스와 분리돼서 간다는 우리의 논리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특히 여·야·정이 협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관 2인 임명과 관련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여야가 압박하자 내놓은 작심 발언에서다. 국익과 민생을 잊고 정쟁에만 매달린다면 외환보유액이란 방파제는 순식간에 모래성이 될 수 있다.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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