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옛 정취를 간직한 서부두 새벽시장. 포구의 규모는 작지만 제주표 수산물을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어 이른 새벽부터 장을 보러 온 제주도민들로 활기가 넘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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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들 주로 찾는 ‘서부두 새벽시장’ 오래된 항구의 정취 고스란히…갈치·삼치·방어 등 종류도 가격도 ‘굿’
아라리오 뮤지엄서 앤디 워홀·백남준·장환·데미안 허스트 등 거장 작품 ‘한눈에’ 건입동선 얼큰한 동태탕 ‘한 그릇’
사람도 문물도 배를 타고 건너오던 시절, 제주항은 매우 번성했던 지역이다. 10부두까지 생겨날 만큼 커지고 영역도 넓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제주의 중심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다행인 점은 여전히 항구만의 정서가 남아있다는 것. 비린내와 같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빈티지다. 조금씩 변하고 뭔가 새로 생겨도 어쩐지 영원히 오래된 골목 같은 이곳, 좋은 곳은 다 가봤다는 n차 여행자에게 추천한다.
제주표 수산물을 가장 싸게, 서부두 새벽시장
제주항의 옛 이름은 산지항이다. 한라산에서 내린 산지물이 바다를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인데 이제는 뭉뚱그려 제주항이 되었다. 이름은 바뀌었어도 옛 정취를 간직한 작은 포구는 남았다. 오래전 돈지머리 혹은 앞돈지로 불렸던 서부두다. 돈지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바닷가를 뜻하는 제주어로 ‘자연스레 형성된 천연 포구’를 의미한다.
이맘때 단연 인기 어종인 찬란한 빛깔의 은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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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두의 새벽녘은 늘 뜨겁다. 바다로 나갔던 고깃배들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생선 노점이 후다닥 생겨난다. 규모가 작고 상인 수도 적지만, 나름 새벽시장이자 번개시장인 셈이다. 제주 지리를 좀 아는 사람들이라면 건입동 제주시 수협공판장 부근으로 이해하면 된다. 개장 시간은 동계 기준 오전 6~9시다.
서부두 새벽시장의 주 고객은 제주도민들이다. 개중에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꿀 같은 새벽잠을 마다하고 온 데는 이유가 있다. 제주시에서 가장 저렴하게 생선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간간이 관광객이 섞여 있다면 제주에 능통한 n차 여행자임이 분명하다. 생선을 살 때 초급자는 동문시장, 중급자는 오일장, 고수는 서부두 새벽시장을 찾는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동문시장에서 파는 갈치, 옥돔 중 절반 이상은 이곳에서 건너간다.
이맘때, 노점 가판대의 주인공은 단연코 갈치다. 제주 갈치의 상품성을 가장 높게 쳐주는 이유는 비늘이 곱고 온전하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찬란한 빛깔을 자랑하는 은갈치는 5월부터 11월까지 주로 채낚기로 잡는다. 채낚기는 모릿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15개 전후한 바늘을 달고 수직으로 늘어뜨려 잡는 방식이다. 이 시기엔 민첩한 10t 미만 소형 어선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채낚기가 막을 내리면 그다음은 연승방식으로 옮겨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형 어선 차례다. 모릿줄에 가로로 여러 개의 아릿줄을 달아 잡는데 겨울 밤바다의 수평선을 환히 밝히는 주인공들이다.
새벽시장에서 갈치 다음으로 많은 것은 삼치다. 남해안에서 끝물이라는 생선을 여전히 만날 수 있는 이유는 바다에 계절이 한 걸음 늦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지상은 겨울이지만 바다는 아직 가을이란 뜻이다. 그런데 삼치의 가격이 수상하다. 족히 70㎝가 넘는 대물 한 마리가 3만원에 불과하다. 회로 뜨면 7~8명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크기다.
이 밖에도 노점에는 방어, 고즐맹이(꼬치고기), 참돔, 바닷장어, 까치복, 백조기 등 다양한 생선들이 누워 있다. 등장이 늦었던 옥돔도 슬슬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제주에서는 옥돔을 그냥 생선이라 부른다. 겨울에 가장 맛있다는 옥돔의 꼬리에는 노란 무늬가 선명하다.
취급하는 생선이 비슷해 보여도 상인들은 저마다 비장하니 내세울 품목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요즘 한창이라는 대방어는 물론이고 9㎏ 괴물 장어, 눈 시뻘건 금태, 여름에 나는 한치까지 불쑥불쑥 내다 판다. 거기에 더해 빠른 칼 솜씨를 자랑하는 상인도 있다. 원하면 값싼 고즐맹이라 할지라도 냉동고에 바로 저장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손질해 준다. 생선을 손질하고 포장에서 택배까지 해주는 업체들도 있다. 생선회는 1㎏당 4000원에 필레를 떠 준다. 5㎏짜리 중방어의 경우 생선값 3만원에 회 뜨는 비용 2만원만 더하면 숙소로 가지고 가 일행들과 실컷 먹을 수 있다. 일반 생선은 상자당 2만5000원을 받는다. 깔끔히 손질해서 여러 개의 소포장 실링 용기에 담아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 밀봉하는 것까지의 비용이다. 여기에 1만원을 추가하면 택배까지 가능하다.
문화를 주도하는 핫플,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의 자랑거리에는 수려한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수준 높고 다양한 전시 콘텐츠도 포함된다. 본태박물관, 김창열미술관, 유동룡미술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 최고의 컬렉션은 제주항 부근의 원도심에도 있다.
수준 높은 전시 콘텐츠로 구도심 핫플레이스가 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호텔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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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넷(Artnet)이 선정한 세계 100대 컬렉터이자 미술가인 김창일 회장도 제주시 원도심의 낡은 건물을 인수해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한때 극장, 여관, 병원 및 모텔로 쓰인 건물들이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 동문모텔Ⅰ·Ⅱ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보존과 창조’는 이들 미술관의 핵심 주제다. 탑동시네마의 경우 극장 특유의 높고 널찍한 상영관은 물론 영사실과 매점 등 부속실까지 전시실로 꾸몄다. 뼈대를 드러낸 낡은 콘크리트 공간이 품은 것은 무려 앤디 워홀(미국), 백남준(대한민국), 수보드 굽타(인도), 장환(중국), 고헤이 나와(일본), 데미안 허스트(영국), 키스 헤링(미국) 등 거장의 작품들이다.
동문호텔Ⅱ에서 만날 수 있는 구본주 조각가의 작품. |
동문모텔Ⅰ·Ⅱ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탑동시네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개장 10년 차에 어느새 구도심의 문화를 주도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동문모텔Ⅰ의 컬렉션은 낡은 욕조와 빛바랜 타일만큼이나 심오하다. 24명 작가 250점의 작품들이 추구하는 바도 제각각이다. 도발과 논란의 아이콘 채프먼 형제, 신표현주의의 선구자이며 거꾸로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작품도 이곳에 있다. 그림, 조형, 설치, 영상, 미디어로 표현된 난해한 세계, 동문모텔Ⅰ엔 분명 뭔가가 있어 보인다. 동문모텔Ⅰ에 비해 Ⅱ의 테마는 단순하고 독특하다. 37세의 나이에 요절한 구본주 조각가의 ‘아빠의 이야기’다. 작품들은 가족 혹은 나 자신을 투영한다. 분명 정답고 익살스러운데도 한 바퀴 훑고 나면 괜스레 촉촉해진다. 작가가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다.
여행지에서 미술관을 돌아보는 일은 고조된 감정을 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곳을 더욱 특별하게 기억하는 방법의 하나다. 아라리오 뮤지엄 세 곳은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동선 내에 있다. 제주 여행 중 한나절 일정으로 적극 추천한다.
뜨끈한 한 그릇, 동태탕과 꿩메밀칼국수
건입동은 좌로는 탑동공원, 우로는 사라봉에 이르며 제주항을 오롯이 품고 있는 동네다. 그런데 n차 여행자들의 시선과 입맛이 건너오는 중이다. 변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하고, 특별한 듯하면서도 평범한 매력을 드디어 포착한 것이다.
진하고 담백한 육수 맛이 일품인 돈물국수의 꿩메밀국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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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입동의 관심 유발 요인 중 행동대장은 단연코 동태탕이다. 육지에서 흔하디흔한 것이 동태탕인데 굳이 제주까지 와서?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로컬은 물론 입맛이 까다롭다는 10년 차 제주 이주민(서울 것, 제주 것 다 먹어봤다는)들마저 폭발적인 지지를 보낸다. 동태탕을 취급하는 식당이 슬기식당, 안전식당, 동서지간, 겨우 3곳뿐인데도 숙취를 꾹꾹 참았던 ‘프로해장러’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물론 조금만 늦으면 대기를 각오해야 한다. 뚝배기에 넘치도록 담긴 내장과 살덩어리, 제주민만 눈치챌 수 있다는 된장 한 스푼이 절묘하다. 한 그릇에 1만원, 식당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니 취향은 결국 먹어 본 후의 선택이다. 그리고 명심하자. 순한 맛은 덜 매운맛이 아니라 ‘맑은탕’이라는 것!
참고로, 건입동에서 지나칠 수 없는 식당이 한 곳 더 있다. 제주 출신 부부가 한자리에서 25년을 지켜온 노포 돈물국수다. 메뉴는 한 가지, 꿩메밀국수뿐! 여름에만 검은콩국수가 추가된다. 제주는 전국에서 메밀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빙떡, 모멀만듸(메밀만두), 모멀죽(메밀죽), 돌레떡(경단) 등 전통음식은 물론이고 몸국이나 고사리육개장에도 메밀을 넣었다. 꿩메밀국수도 매한가지다.
돈물국수의 메밀면은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반죽해 만든다. 밀가루를 섞지 않은 순도 100%인 데다 껍질을 최대한 제거하다 보니 수저로 떠먹어도 될 만큼 면이 뚝뚝 끊어진다. 면 향은 고소하고 식감은 부드럽다. 또한 꿩을 푹 고아 낸 육수는 ‘국물에 진심이 담겼구나’ 생각될 만큼 진하고 담백하다. 돈물국수의 메뉴판에는 여전히 막걸리가 2000원, 소주가 3000원이다. 고작 6개 남짓한 테이블, 애초부터 부부는 욕심이 없었다. 그저 내 음식을 먹어주는 이들이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제주 | 글·사진 김민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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