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이 지난해 1월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디지털 행정 서비스 안정성 확보를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상관 없습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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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한 고위 관리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한 말이 화제가 됐다. “우리 공무원은 영혼이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을 중앙정부 국장급 관리가 바람보다 빨리 눕는 풀처럼 자조 섞어 한 말을 두고 세간에선 공감, 안타까움, 냉소, 조롱이 뒤섞인 반응이 나왔다. 앞서 베버는 “근대 관료제도가 개별적 인격이 아닌 제도적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작동”(1905,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하는 것의 장단점을 지적하며 “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관료 집단은 합리성·전문성에 실질적 집행권까지 갖춘 효율적 조직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대한민국 공무원은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며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공무원헌장)하는 ‘공익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어지간히 사회생활을 한 시민이라면 관청을 상대로 민원 처리를 하면서 ‘친절한 장벽’ 앞에 선 것 같은 경험을 한 번쯤은 해봤음 직도 하다. 그런 답답함은 공직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노한동 지음)은 한국사회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공직사회가 실은 “가짜 노동과 쓸데없는 규칙, 구조적 비효율과 책임 회피의 메커니즘”으로 가득하다고 돌직구를 날린 책이다. 지은이 자신이 “지난 10년간 경험하고 관찰한 공직사회의 무능한 일상과 좌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에세이이자 르포”다.
지은이는 서울대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해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디뎠다. 출판, 체육, 저작권 담당을 두루 거치면서 실무를 익히고, 고위직으로 갈수록 경직된 공무원 사회 특유의 분위기와 처세술에도 적응하려 애썼다. 그러나 꼭 10년 뒤인 지난해 서기관으로 승진하자마자 공무원을 그만뒀다. 다른 구체적 계획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공직자 업무의 대부분이 관습에서 기인한 비효율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자괴감과 무력감, (…)더 큰 문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사이드웨이, 1만8000원 |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관습에 기댄 사고구조를 가진 평범한 ‘범생이’가 봐도 지극히 이상한(…) 체계적으로 무능하고 구조적으로 비합리적이면서도 내부에선 그걸 지적하거나 고칠 의지가 없었고, ‘이상한 나라의 임금님’처럼 윗사람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추켜세웠”던 공직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폭로한 “사적인 에피소드이자 공적인 기록”이다. “그런 분위기에선 너무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관료가 국가와 사회를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에 반복적으로 실패했다.”
지은이가 경험한 사례만도 차고 넘친다. 출판과 근무 시절, 동료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어봤냐고 묻길래 “올해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라고 극찬했다. 그냥 일상의 대화였다. 지은이가 뒤늦게 군에 입대한 직후, 박근혜 정부가 특정 문화예술인의 정부 지원을 배제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한 사실이 폭로됐다. 지은이는 그제야 “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지만 (동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던” 상황을 떠올리며 자문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상급자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지은이가 책쓰기를 마무리할 즈음인 지난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한때나마 출판의 해외 진출 업무를 맡았던 뿌듯함보다는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두려움”이 다시 생각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직사회는 블랙리스트를 지시받고 실행할 때도 무기력했지만, 처벌과 조사가 끝난 뒤에도 그 사건은 잊기로 약속한 듯이 반응을 자제하는 걸 미덕으로 여겼다. 그런 침묵은 사실 체념과 냉소에 가까웠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지은이가 온라인 플랫폼 ‘브런치 스토리’에 본인의 공직사회 경험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를 올렸을 때는 곧장 인사과 동료가 우려와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직원’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연락했다는 점을 굳이 강조했다고 한다.
지은이의 눈에 공직사회는 역설로 가득 찬 곳이다. 복잡한 현실을 5분 만에 읽을 수 있는 한 장의 보고서로 이해하려 하고, 현장과 갈수록 멀어지면서도 술자리에서는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을 외친다. 입만 열면 ‘적극 행정’을 말하면서 그저 잘 버틴 순서대로 승진시키고, 국민의 공복을 자처하지만 누구보다 권력자에게 약하고 국민에게 강하다.
중앙부처 공무원은 지원 사업의 구조를 효율화하여 예산을 감축하면 오히려 질책을 받는다. 각 부처가 해당 분야의 예산을 늘리려 안간힘을 쓰며, 예산의 규모가 부처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직사회에선 다른 부처나 부서의 정책을 모아서 문서로 보기 좋게 만들어 보고하는 ‘호치키스 행정’이 승진과 출세에 유리하며, 주로 그런 행정을 하는 기획재정부나 행정안전부 같은 부처에 있어야 관료로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도 공직사회의 관료주의와 출세주의를 잘 보여준다.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세종청사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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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여러 제도가 별무효과였거나 외려 상황을 악화시킨 이유는 “다양한 층위에서 일어나는 관료들의 저항, 그리고 제도의 경로의존성”이라는 게 지은이의 진단이다. 급진적 변혁이 부작용이나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지은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몇몇 방안을 제시한다. 전문성 대신 안일함을 키우는 ‘Z자형 순환보직제’ 개편과 예산의 합리적 편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짜 노동’을 걷어내는 게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가짜 노동은 덴마크의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이 제시한 개념으로,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노동과 유사하지만 노동이 아닌 활동, 무의미한 업무’ 등을 포괄한다. “공직사회에서 가짜 노동은 만연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뿌리 깊게 퍼져 있다.” 보고서 한 장으로 예쁘게 쓰기, 최고위직들의 형식적 현장 방문 사전 세팅, 언론에 장관 사진 배포하기는 극히 일부 사례일 뿐이다. 가짜 노동은 그 자체로 비효율적이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짜 해야 할 일에 소홀하게 된다는 거다. 지은이가 “사골 우려먹듯 반복되는 정책의 재활용, 편리한 현상 유지, 뒷북 대응 등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은 토론이 박멸된 뒤 튀지 않는 이들의 공직사회가 만들어낸 무난한 복종의 결과물”이라고 비판하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까지 떠올린 대목은 신랄하다 못해 아슬아슬할 지경이다.
‘먹던 물에 침 뱉지 말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지은이가 책을 쓰기로 한 것은 “이 책이 단순히 나의 실패담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공직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형성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가 앞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전문관료와 행정의 힘에 대한 믿음이 깔렸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추천사에 “똑똑했던 사람이 공무원이 되면 탁월함을 잃는 이유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썼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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