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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조선 건국은 결국 역사의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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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고려 멸망, 조선의 건국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


혼란과 무질서, 충격과 슬픔 속에 한해가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발전한다는 희망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역사의 발전은 아주 긴 시간을 두고 일어나기 때문에 길어야 100세에 불과한 사람의 일생으로는 목격할 수 없다. 단지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며, 먼 훗날의 정당한 평가를 기대할 뿐이다. 우리 역사 속에도 그때는 몰랐지만, 역사의 발전으로 평가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1392년 조선 건국이다.



공민왕 피살로 고려말 개혁 좌초

우왕 통치 14년 최악의 암흑기

사대부 좌장 이색 우왕 비판 안 해

정도전 “부작위 책임져야” 추궁

정도전에 반역자 딱지 붙었지만

긴 시간 놓고 보면 백성 위한 선택

개혁 외면한 고려 시스템 노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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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전경.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경복궁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으면서 국왕이 실천해야 할 도리를 이름에 담았다. [사진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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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후반 들어 고려는 노쇠한 기운이 역력했다. 우선, 통치 시스템이 노후화되었다. 1019년 거란과 전쟁이 끝난 후 11세기 평화의 시기에 완성된 여러 제도가 30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간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나라도 개혁을 통해 새로워지지 않으면 낙후될 수밖에 없는 법인데, 고려는 무신 집권기(1170~1270년)와 원의 간섭 시기(1259~1356년)를 거치면서 개혁을 추진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고려의 기득권층은 크고 작은 불법행위를 저지르면서 그것이 오래된 관행이라고 강변했고, 그 때문에도 개혁의 기회를 놓쳤다. 이렇게 고려의 위기는 오랫동안 천천히 다가왔고, 결국 1374년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폭발했다. 공민왕은 반원(反元) 운동을 일으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고, ‘일국갱시(一國更始·나라를 다시 시작함)’를 내세우며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반대파에게 암살당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에 이어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의 현실은 암울해졌다. 왕자인지조차 의심받으며 정통성에 약점이 있던 우왕은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대신 왕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이인임이 권력을 잡았다. 우왕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고, 이인임은 우왕이 정치에 관심 갖지 못하도록 했다. 관리들에 대한 인사가 이인임의 손에서 결정되어 안팎의 요직이 모두 그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양민을 억눌러 노비로 만드는 일이 횡행하는 등 권력자가 무책임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났다. 우왕에게는 혼군이란 말도 아깝다. 기녀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고, 개경 시가지에서 말 달리며 활쏘기를 즐겨 사람들을 해쳤으며, 심지어 관리의 부인이나 딸을 납치하고 겁탈하기까지 했다. 조선에 연산군이 있다면, 고려에는 우왕이 있었다. 우왕과 이인임이 동반한 14년은 고려의 암흑기였고, 결국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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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다시면에 있는 정도전 유배 현장. 정도전은 이곳에 3년 동안 유배돼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다짐하게 됐다. [사진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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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는 문제와 해답을 동시에 갖는다고 했던가. 다행히도 당시 고려에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뒷날 신흥사대부라고 불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방 향리의 자제이자, 과거를 통해 서울로 갓 올라온 사람들로, 전통적인 기득권과 거리가 멀었다. 이들이 공부한 성리학은 정치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갖게 했고, 특히 권력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게 했다. 송나라 유학자 범중엄의 “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라는 말이 이들 사이에서 즐겨 회자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공민왕이 성균관에 모아 성리학을 교육하도록 후원했는데, 모두 20, 30대의 젊은 관료들로 정몽주와 정도전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이인임의 반동정치

공민왕의 개혁이 중단되고 이인임의 반동정치가 시작되자 신흥사대부들은 이인임에게 저항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 이들은 관직에서 쫓겨나 뿔뿔이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신산의 시간을 보내며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처음의 뜻을 다 버리고 이인임의 측근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적절히 타협하며 복귀를 도모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 정도전은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섰다. 유배지 전라도 회진현의 거평부곡에서 그가 쓴 글에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내용이 많다. 일반적으로 유배지에서 쓰는 글 가운데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시, 즉 연군시(戀君詩)가 많지만, 정도전에게는 그런 글이 없다. ‘님’ 대신 ‘민’을 발견한 것으로, 훗날 정도전이 민을 위한 정치, 즉 위민(爲民) 정치를 주장하게 되는 출발점이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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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문집 『삼봉집』에 수록된 『조선경국전』의 첫 장. 『조선경국전』에는 국가 운영의 기본 방향이 제시돼 있다. [사진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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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유배에서 풀린 정도전은 또 7년 동안 관직에 복귀하지 못했다. 30대를 고스란히 유배와 유랑으로 보낸 셈이었다. 그렇게 관리로서의 경력이 끝나나 싶었던 42세 나이에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고,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가 정도전이 건넨 첫 마디였다. 이 한마디 말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며, 그로부터 5년 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자 자신이 생각해왔던 위민 정치를 실현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첫 번째는 토지제도 개혁이었다. 정도전은 전국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한 다음 직접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개혁을 구상했다. 이 과격한 주장은 당장 현실의 벽에 막혔지만, 근본적인 개혁이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한 결과임은 분명했다. 이렇게 정도전의 주장은 독특했고, 하나같이 위민 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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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초상. 1994년 제작된 정부 표준 영정이다. 실제 정도전의 모습은 알 길이 없다. [사진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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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뿌리 깊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수년 동안 권력투쟁이 이어졌다. 그때 정도전은 권력에 상응하는 책임의 문제에 주목했다. 1391년 정도전은 이색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색은 성균관에 모인 신흥사대부의 좌장이었고, 두루 존경받는 학자였다. 하지만 신흥사대부가 이인임과 싸울 때 침묵했고, 우왕의 정치를 비판하지 않았으며, 위화도 회군 후에는 이성계 반대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성계파에서는 여러 가지로 모함해서 그를 죽이려 했지만 근거가 없었다. 정도전은 이색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죽여야 한다는, 말하자면 ‘부작위(不作爲)’의 책임을 물었다. 전에 없던 논리였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리 만무했지만, 이때부터 정도전은 권력자의 책임 문제를 천착했다. 조선 건국 후 저술에서 권력이 국왕에게 있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국왕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재상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권력자를 검증할 수 있고, 책임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도전의 독특한 재상론(宰相論)이 탄생했다.

정몽주의 충절 무얼 위한 것이었나

고려의 기득권 세력은 점차 왕실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했고, 공양왕을 앞세워 이성계 진영과 결전에 나섰다. 그러자 “민심을 잃은 군주를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맹자가 역성혁명을 당연한 일로 설파한 바 있으므로 답이 정해져 있었다. 결국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세우는 역성혁명이 단행되었고, 정도전은 태조의 즉위교서를 지으면서 민심과 천명의 소재를 들어 혁명을 정당화했다. 반면, 정몽주는 죽음으로 충성을 증명했고, 그것 때문에 조선 500년 내내 충신으로 존경받았다. 하지만, 정몽주에게는 질문 하나를 더 해야 한다. 과연 그 충성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충성을 바치는 대상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은 채 무조건 충성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질문이다. 정도전에게는 조선 500년 동안 반역의 이미지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이런 평가는 자기모순이다. 정도전이 아니었으면 그들이 그토록 충성을 다한 조선왕조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에게는 ‘최초의 조선인’이란 칭호를 붙이고 싶다. “임금은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임금의 하늘이다.”(정도전, 『조선경국전』)라는 이 문장만으로도 그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까?

민생을 살피지 않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위민을 내세워 조선을 건국한 것은 바로 고려 사람들이었다. 이 선택으로 그들은 고려보다 살기 좋은 새 나라를 만들었다. 역사는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할 때만 가능하다. 혹시 현실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된다면,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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