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홍 동국대 안보북한학과 대우교수 |
계엄과 탄핵 사태로 대한민국의 정국이 요동치는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올해까지 6년째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고, 지난해 연말에 닷새 동안 열렸던 노동당 제8기 제11차 전원회의 연설에서도 한국 정치 관련 내용이 없었다.
그동안 대남 이슈가 있을 때마다 거친 비방을 쏟아내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입도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북한 선전 매체들은 12·3 비상계엄 사태 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첫 반응을 내놨고, 그 이후에도 보도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선포 원인으로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을 명시적으로 지목했는데도 소극적으로 비칠 정도로 무대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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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 보도 속 사태 추이 주시
‘두 국가론’ 따른 거리두기에다
직접 개입 따른 역풍 피할 의도
지난해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1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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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반응은 과거 북한의 행태와 너무 달라 ‘뉴노멀’이란 해석이 나올 정도다. 예컨대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자 북한은 이틀 만에 “수구 세력에 대한 인민의 심판”이라고 비방했다. 2016년 12월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때는 대대적인 선전 공세를 전개했다.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 이후 불과 두시간여 만에 속보를 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달이 되도록 당국 차원의 공식 반응이 안 보인다. ‘평소 북한답지 않은 반응’이라는 점에서 그 속셈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계엄과 탄핵 사태의 향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섣부른 개입이 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큰 가닥이 잡힐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계산이 깔린 듯하다.
과거에 북한의 행태가 한국 국내 정국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사흘 앞두고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했지만 ‘선거용’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당시 보수 야당이 승리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과 그해 12월 18대 대선을 앞두고 김정은의 ‘대남 명령 1호’는 선거 개입 지시였다. “역적 패당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야 한다”며 독려했지만, 선거 결과는 빗나갔다. 대남 개입의 실패 사례를 경험적으로 아는 김정은은 성급하게 이번 탄핵 정국에 개입하기보다는 사태 추이를 관망하며 신중하게 접근해 실리를 챙기려는 의도가 읽힌다.
‘적대적 두 국가론’ 정당화를 위해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과 거리 두기에 나섰다는 관측도 가능하다. 2023년 12월 두 국가 선언 이후 김정은은 노골적으로 대남 관계 단절을 획책하고 있다. “그 나라(한국)를 의식하지 않으며, 마주 서고 싶지도 않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통일전선부 등 대남기구 10여개를 폐지하고 남북을 잇는 철도·도로 연결 지점도 폭파했다.
지난해 10월 15일 북한이 경의선과 동해선의 남북 연결 철도와 도로를 폭파하는 모습.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폭파 이틀 뒤인 10월 17일 ″이는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제한 공화국 헌법의 요구와 적대세력들의 엄중한 정치군사적 도발 책동으로 말미암아 예측불능의 전쟁접경으로 치닫고 있는 심각한 안보환경으로부터 출발한 필연적이며 합법적인 조치″라고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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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의 대북 대화 제안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압록강 수해 구호물자 지원 제안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제안한 ‘당국 간 대화 협의체’도 묵살했다. 지난 2022년 ‘담대한 구상’ 제안에 대해 나흘 만에 김여정이 맹비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해 12월 당 전원회의에서도 북한은 한국을 ‘반공 전초 기지’라고 한 차례 비방했을 뿐 별다른 메시지를 내놓지 않았다. 한국을 무시하는 배타적 태도를 통해 남북의 ‘민족 내부 특수 관계’를 청산하고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고착해 나가겠다는 전략이 엿보인다.
북한이 경계해온 남한풍 차단 문제를 놓고 득실을 저울질 중일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김정은 체제에서 북한은 2020년 12월 ‘반동 사상문화 배격법’, 2021년 9월 ‘청년 교양 보장법’, 2023년 1월 ‘평양 문화어 보호법’을 잇따라 제정해 자본주의 요소 척결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남한 최고 지도자의 탄핵 국면을 적절한 수위에서 공개해 김정은의 ‘애민 지도자’ 우상화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도 있다.
김정은 정권은 새해 들어 한국의 정국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적대적 두 국가라는 기존 대남 전략 방향을 다듬어 갈 것으로 전망된다. 탄핵 정국을 틈타 해커와 댓글 부대 등을 동원해 뒤에 숨어서 한국 사회의 혼란을 부추기는 은밀한 공작은 쉬지 않고 진행할 것이다. 한반도 안보가 엄중한 시기에 조속한 국정 정상화는 물론이고 안보 태세 확립과 대북 정보 활동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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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홍 동국대 안보북한학과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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