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자유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황사영의 논리는 온당한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에 있는 '눈물의 십자가' 조형물.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 당한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가 관노가 돼 제주도로 가던 중 어린 아들을 올려 놓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위 위에 세운 것이다. /유석재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25년의 첫날, 저는 추자도(楸子島)에 있었습니다. 진도와 제주도 사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 누군가는 우연히 갔다가 닷새 동안 발이 묶이기도 했다는, 좀처럼 찾아가기 어려운 섬입니다.
이 섬 전체를 감도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섬과 관련된 역사상의 유명인으로는 고려 말의 최영 장군도 있긴 합니다. 제주도로 출정해 원나라 말 목장 관리인이던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추자도에 정박했고, 섬 사람들에게 어업 기술을 전수했다고 합니다. 추자도엔 최영 장군의 사당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영 장군의 이야기조차 위에서 언급한 ‘신화’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건 애끓는 모정(母情)과 관련된 만인의 공감을 얻을 만한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질녀, 그러니까 다산의 맏형 정약현의 딸이 있었습니다. 학식과 교양을 갖춘 그 딸의 이름은 정명련이었지만 정난주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열여섯 나이에 사마시에 급제한 남편 황사영(1775~1801)과 함께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남편은 대역죄인으로 몰려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상추자도 올레길 18-1코스에서 나바론하늘길로 빠지는 길목 근처 마을 담벽에 그려진 벽화. 정난주·황경한 모자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유석재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아내 정난주는 목숨은 부지했지만, 제주 남쪽 대정현의 관노(官奴)가 돼야 했습니다. 강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잡혀 가던 정난주는 두살배기 아들 황경한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평생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어린 아들의 미래를 염려한 어머니는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을 호송 관리에게 뇌물로 주고 추자도 동쪽 해안에 배를 멈춰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이름과 내력을 적은 헝겊을 아기의 옷에 붙인 뒤 바닷가 바위 위에 아이를 내려놓은 뒤 울음을 삼키며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관리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는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해주세요. 다행히 어부인 오씨 부부가 아이를 거둬 키웠습니다. 황경한은 자신의 내력을 알게 된 뒤 제주도에서 고깃배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늘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정난주는 평생 노비로 살면서도 교양과 학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품어 ‘서울 할망’이란 별명으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이 얼마나 애틋한 이야기인가요. 추자도엔 지금 정난주가 아들을 올려놓았다는 바위에 거대한 ‘눈물의 십자가’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제주올레길 18-1코스를 순방향으로 걷다 예초리 기정길을 지나 언덕 위에서 코스를 이탈해 왼쪽으로 올라갔다 다시 해안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 길목에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천주교 제주교구가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하추자도 황경한의 무덤 뒤편에 천주교 측이 세워 놓은 정난주와 황경한 모자의 상(像). 왼쪽에 보이는 것은 미켈란젤로 '피에타'의 복제품. /유석재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올레길이 지나는 황경한의 무덤 뒤에는 자그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복제한 조각품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그 유명한 조각품 말입니다(그런데 이 작품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어머니의 신체 비율이 아들보다 지나치게 큽니다). 황경한은 정난주보다 오래 살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추자도 곳곳에선 정난주·황경한 모자와 관련된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황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은 왜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던 걸까요? 아니, 그는 정말 무고하게 희생당한 ‘순교자’에 불과했던 걸까요? 그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를 중국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됐습니다. 여기서 ‘백서’라는 것은 ‘국방 백서(白書)’의 백서가 아니라 명주천에 적은 편지여서 백서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무려 1만3311자가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올레 최고의 난코스라는 올레길 18-1코스를 거쳐오는 동안 본 추자도 여러 곳의 황경한 관련 설명문 어디에도 그 황사영 백서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설명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추자도 황경한 무덤 근처 '모정의 쉼터'에 세워진 '황경한의 눈물' 표지판. 황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백서'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유석재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정난주와 황경한 모자의 스토리가 아무리 애틋하다 하더라도, 정난주의 남편이자 황경한의 부친인 황사영이 쓴 그 ‘백서’의 내용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버무려도 좋은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백서는 박해 받고 있는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전한 뒤 주교에게 건의하는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아마도 한국 천주교사(史) 최악의 흑역사(黑歷史)일 것입니다.
“대왕대비(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고 세력 강한 신하가 권력을 농락하기 때문에 정사가 뒤틀리고 혼란해 백성들은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청나라 황제로 하여금 조선을) 속국이 될 것을 명하도록 해 그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왕래를 트게 해, 조선을 영고탑(만주족의 발상지)에 소속시켜 황조(皇朝)의 근본이 되는 땅을 넓히게 하십시오.”
“중국 종실의 한 여자를 공주로 삼아 시집 보내서 왕후가 되게 하면 지금의 왕은 부마가 될 것이고 그다음 왕은 외손자가 되므로 스스로 마땅히 황조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조선)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끝인데다 이제 태평한 세월을 200년이나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뭔지 잘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선 수백 척과 정예병 5만~6만 명을 동원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이게 무슨 정신나간 소린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②아예 조선을 영원히 청나라의 부마국으로 삼아 속박을 받게 한다면 더 좋은 방법이다.
③조선은 군사력이 최약체인 나라이니, 프랑스 전함 수백 척과 군사 5만~6만 명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 최소한 협박을 통해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
‘세상에 무슨 이런 친중친불전범매국반역자가 다 있나’라고 분노하기 전에 하나씩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백서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황사영이란 자가 얼마나 국제 정세와 현실 판단에 무지한 책상물림 양아치 선비였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교황이 청원을 한다고 해도 청나라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청나라라고 해서 천주교에 우호적인 입장도 아니었고, 불과 3년 뒤 나폴레옹 전쟁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에서 동아시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아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십년 뒤 제국주의 시대의 ‘함포외교’를 예견한 것이라면 예지력을 갖춘 반역자라고 할 수 있을테지만요.
1만3311글자를 명주천 위에 깨알 같이 적어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황사영 백서'. 1925년 구스타브 뮈텔 주교가 의금부에 있던 이 백서를 입수해 교황청에 보냈고, 현재 로마교황청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런데 학계에서는 황사영에 대한 평가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과거엔 ‘민족 반역자’ ‘구라파에 대한 사대주의자’ ‘기만적 천주교리에 맹목된 광신자’ 같은 혹평이 많았지만, 뒤로 갈수록 ‘인권존중 옹호 텍스트의 저자’ ‘한국 근대화의 첫 발걸음’ ‘사회변혁을 시도한 개혁운동가’ 같은 긍정적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긍정론은 대체적으로 ‘신앙과 개인 인권의 자유를 옹호했다는 의미가 있다’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암울했으면 그런 방법까지 강구했겠는가’라는 ‘내재적 접근법’의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최근 어떤 신문의 칼럼에서 한 철학자는 이런 평가까지 했습니다.
“외세를 통해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는 점에서 대역죄인으로 각인되어 왔지만, 무자비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던 극한의 상황에서 보편적 권위에 호소하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뭐라고요?
‘보편적 권위’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설마 가톨릭 수장인 교황이 19세기 초의 비가톨릭 국가까지도 그 ‘보편성’을 인정해야 마땅한 존재라는 얘기는 아닐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를 멸망하게 해 주세요’라는 결코 범상치 않은 호소를 누, 구, 나 할 수 있다고요?
아마 이완용이나 송병준도 ‘나는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는 이 극한적인 후진국을 아예 없애 달라고 아시아의 보편적 권위인 대일본제국에 호소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간략하면서도 제대로 핵심을 말한 평가는 오히려 한국 천주교 산하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낸 ‘한국가톨릭대사전’의 황사영 항목일 겁니다.
“그의 ‘대안 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 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은 저서 ‘역사관과 역사학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시좌에서 본다면 황사영은 공화정을 꿈꾼 최초의 근대적 인간으로, 그리고 백서는 인권선언과 국제적 연대의 이정표로 재평가할 수도 있다. (중략) 그러나 필자는 역사의 법정에 선 황사영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역시 자신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서양 군사력이라는 또 하나의 물리력을 빌리려 했다는 점에서 상대와 똑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조선왕조 지배층의 피비린내나는 박해는 전통적 제사 관습을 부정한 천주교의 ‘천상천하 유아독존’격 포교 전략이 자초한 것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황사영은 ‘천주교도는 외세와 내통하는 대역죄인’이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조선 조정에 보냄으로써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수많은 천주교인들에게 큰 피해를 안겼습니다. 그중에는 자신의 아내 정난주와 아들 황경한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반역자의 처와 자식이라는 멍에를 평생 짊어질 뿐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생이별을 했던 일은 그 원인이 황사영 자신의 반역이었습니다. 정난주 모자의 아픈 사연은 황사영 백서와는 별개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황사영에 대한 비판이 그들 모자에게 미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황사영의 행위가 덮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행위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천주교인이 포함된 수 많은 자국 백성들을 전쟁의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반역이나 역적 같은 과거 왕조 시대의 용어를 사용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현대 법률상의 외환죄(外患罪)였습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대통령조차 내란죄와 더불어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 면제에서 제외되는 그 외환죄 말입니다.
도대체 ‘인권과 신앙의 자유와 평화적 선교를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도록 청원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통제한다’는 논리와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요?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과 묘비.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의 아들'이라 새겨져 있다. /유석재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에는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과 신앙의 증인 정난주(마리아)의 아들’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순, 교, 라고요. 표준국어대사전은 ‘순교(殉敎)’에 대해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황사영의 경우엔 ‘모든 압박과 박해를 자신의 국가와 백성들에 미치도록 해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려 했던 일’이라는 개념으로 고치는 게 더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