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 남의현
그림 | 김상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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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봤는데 내가 귀여워서 깜짝 놀랐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관희가 더 귀엽긴 해.
관희랑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생겼지만 어떤 부분들은 명확히 다르다. 그런 부분들은 명확한 만큼이나 설명하기가 힘들다. 우리가 극장에서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을 두 번째로 관람하기 전까지, 우리조차 우리에게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두 번째 보았을 때의 느낌은 아주 달랐다. 첫 번째 보았을 때는 슬프고 쓸쓸했는데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쓸쓸하고 슬펐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다르다. 매일 밤마다 생각한다. 관희가 내 위에서 내 아래로 내려갈 때, 내가 관희 위에서 관희 아래로 내려갈 때 곰곰이.
세면대에 거품을 뱉고 젖은 칫솔도 잘 걸어 두고 침대로 갔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차례인데, 그러니까, 누워 있는 관희 위에 올라타서 가만히 지켜보기. 귀여운 관희 얼굴 위에 귀여운 내 얼굴. 그러니까 관희와 나는 서로의 얼굴. 아니면 거울이거나. 네 얼굴이 관희니까 나는 거울이다. 관희는 거울. 거울은 관희. 관희 안에 거울 안에 나 안에 나 안에 나 안에. 그러다 보면 내가 거울. 아이고, 하지 마. 하지 말자. 관희야. 관둬라. 거울은 이런 삶 지겹다. 지겨워서 관희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비고 나서 관희의 얼굴에 마구 뽀뽀했다. 그러자 관희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관희가 웩웩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희는 열흘에 아홉 번은 몸이 아프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너무나 건강해 보여서 그냥 다 괜찮아 보인다. 관희가 구토 발작을 일으키면 나는 관희의 등에 손을 얹고 토닥이면서 관희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다 괜찮아 그런다. 관희는 이렇게나 아프니까 가난하다. 그리고 가난해서 계속해서 아프다.
관희는 아픈데 나는 안 아프니까 그게 걱정이 된다. 나는 몹시 건강하고 가난하다. 아니면 건강하지만 가난하다. 그리고 건강하고 가난한 사람이 돈을 버는 편이 낫다. 바로 그게 내 걱정거리다. 건강하지 못한 것만 빼면 사실 관희는 대부분의 면에서 나보다 낫다. 관희는 아프지만 자신을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활에 있어서 자기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와서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것과 별개로 남자다. 관희가 안 아팠으면 관희가 돈을 버는 편이 벌이도 훨씬 나을 것이고…… 관희가 안 아팠으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내가 아프고 관희가 건강했더라면 우리는 얼마만큼 다르게 살고 있을까……
입이 축축하게 젖은 관희가 천천히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새벽에 느닷없이 일어나 물을 할짝거리고 온 개처럼. 나는 관희의 머리칼을 성실히 쓰다듬었다. 관희는 이 여름이 지나면 검사를 위해 한동안 큰 병원에 입원해야 해서 지금 많이 쓰다듬고 많이 껴안고 많이 키스하고 또 많이 뒹굴어 둬야 한다.
관희가 병원에 가면 외로워.
왜?
머리를 쓰다듬을 수가 없잖아.
내가 관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관희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개를 데려오자. 쓰다듬으면 매끄러워서 안심이 되는.
어째서 매끄러운 개를?
관희는 지난밤 꿈을 꾸었는데 매끄러운 개를 주웠다고 했다.
싱그러운 빛의 풀이 나 있는 드넓은 들을 걸었어. 그런데 풀들 역시 3D로 모델링한 것처럼 매끈해서 울창하거나 무성하다는 느낌은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냥 풀이 많다…… 그런 생각을 했어. 그리고 또…… 걷고 있었는데 꼭 일을 하는 기분이었어.
숨이 찼어?
숨이 차지는 않았지만 꽤 힘들었어.
뭐가 힘들었어?
그러니까 내가 계속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관희는 이야기하면서도 숨이 약간 찬 듯 헐떡였다.
걷다가 발목이 축축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거기에 개가 혀를 내밀고 있었어.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날 정도로 매끈한 하늘색 개가. 허리를 숙여서 무심코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너무 매끄러워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어.
매끄럽다니……
확실히 매끄러웠어.
주인을 잃어버렸을까?
아마.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관희는 음 하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나도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관희가 응 하고 마치 작은 개가 짖듯이 대답했다.
한밤중에도 쓰다듬어 알아볼 수 있도록, 되찾기 위한 용도로 생성된 개야.
관희와 나는 하천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빛을 난반사하는 거대한, 너무 거대해서 지쳐 보이는 얼굴 모양 동상이 보일 때쯤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걸었다. 빛 아래 서 있는 낯선 얼굴의 할머니가 보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할머니였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 인사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할머니의 표정은 동상의 표정보다 명확하지 않았지만 왠지 미미하게 웃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 나도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저 할머니의 돈을 빼앗는 것 같아.
관희가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나는 관희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쓸어 주면서 안심을 시켰다.
저 할머니도 우리한테서 뭔가 뺏어 갈 거야.
우리한테서 뭘?
관희는 아프고 또 걷는 게 힘들잖아. 저 할머니는 관희를 걸어서 힘들게 만들잖아.
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우리 할머니가 싫어. 너무 크게 말하고 그래서 나도 크게 말하게 만들잖아. 그게 너무 너무하잖아.
그치만 저 할머니는 안 그럴지도 모르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나와 관희는 거대한 얼굴 동상 앞에 도착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우리는 할머니의 손을 슬쩍 잡았다. 나와 할머니와 관희 순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데 맞잡은 부분이 따뜻했다. 이렇게 나이 들고 깡마른 할머니에게도 에너지가 남아 있구나. 할머니는 전혀 크게 말하지 않고 조곤조곤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그녀가 고등학교에 있었다는 것. 우리가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우리는 아니어도 우리 친구들을 한 번쯤은 가르쳐 봤을 거라는 것. 그렇지만 나는 이 지역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고등학교를 다니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도 할머니에게 해 주었다. 또 우리는 보시다시피 아주 닮고 귀여운 운명적인 연인이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일을 하는 도중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또 관희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관뒀고 이 산책이 끝나고 나면 상병수당을 받으러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갈 거라는 이야기.
아, 맞다. 관희는 상병수당을 받아야 한다. 상병. 상병이라니. 관희는 몇 년간 공장에 다니면서 상처도 나고 병에도 걸렸다. 탈구된 팔. 크고 작은 흉터들. 배를 앓는 일. 약통에서 나는 텁텁한 흙냄새. 자다가 아야야 하고 눈을 뜨고 나도 덩달아 눈을 뜨는 일. 나는 그런 것들과 몇 년이고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도 상병이라는 단어는 내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같이 어색하고 또 어색하다는 게 이상하다.
너희는 어렵구나.
할머니가 말했다.
어색하다고요?
내가 말했다.
너희는 어려운 처지구나.
할머니가 힘주어서, 우리랑 이야기한 것 중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손을 놓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강가를 따라 쭉 걸었다. 할머니를 다시 얼굴 모양 동상에 모셔다드리고 할머니에게 이만 원을 받았다. 우리는 다시 두 사람이 되어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우리는 둘이어서 둘밖에 없어서 서로의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자꾸만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서 관희에게 물었다.
아까 그 할머니, 우리한테 뭐라고 했더라.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했어.
우리가 어려워?
우리가 곤란해 보였나?
나는 곤란하지 않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고 명상을 한다. 유튜브 영상에서는 명상을 할 때 나 자신을 보세요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그럴 때 눈을 감아야 하는지 관희를 보아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그래서 관희와 키스를 하고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간다. 외로운 사람들과 한 시간 동안 강가를 걷고 그들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양쪽에서 그 사람의 어깨를 꼭 감싸고 온기를 나누어 주기도 또 이따금씩 받기도 한다. 오늘처럼. 그러니까 할머니와 귀여운 두 손주처럼. 걷다가 할머니의 다정한 미소가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다정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진심으로 대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이만 원을 받고 집에 오면 일기를 쓴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래서 오늘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일기를 쓸 것이다. 일기를 쓸 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겠지만 그건 오늘 들었던 말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원래 일기를 쓸 때는 괜히 눈물 날 것 같은 느낌이 나니까. 그럴 때는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면서 오래오래 양치를 한다. 내가 오른손으로 양치를 하면 거울은 왼손으로 양치를 한다. 오래오래.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키스를 했다. 오늘 산책을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깨달아서 음 하고 소리를 내면서 입술을 뗐다.
우리가 가난하다는 건가?
그건 맞지.
관희가 끄덕이고 나도 따라 끄덕였다. 우리는 키스를 마저 하다가 또 입술을 떼고 약속했다. 다음에 또 그 할머니를 만나면 이야기해 주기로. 저희 둘이서 이야기해 봤는데 저희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난처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또 키스를 하다가 입술을 떼고 또 약속했다. 앞으로는 우리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기로. 일할 때 좀 더 신중하게 이야기를 하기로. 신중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몹시 어려운 사람이, 아니면 곤란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일기에 적었다.
관희야, 난 돈을 버는 게 무서워.
관희에게 말하는 대신 일기에다 적고 나서 무섭지 않은 일을 찾아보려고 했다. 무섭지 않은 일은 힘들거나 어렵지 않은 일과는 다르다. 무섭지 않은 일은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일. 당신에게 나 자신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는 일. 그리고 내가 당신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절대로 당신이 나를 속일 수 없고 내가 당신을 속여 먹을 수도 있는 일. 나 대신 다른 물건만을 선보이거나 건네주는 일. 그런 일은 좀처럼 찾기가 힘들다. 지금은 산책 아르바이트 말고는 특별히 다른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앱에 산책 광고를 등록해 두고 누군가 우리를 원한다는 알림이 오기를 기다린다. 건강한 내가 일을 하고 있지 않아서 관희에게 미안해야 한다는 게 이따금 쓸쓸하고 외롭다. 이따금은 외롭고 쓸쓸하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일한 곳은 종로의 건물 옥상이었다. 옥상에서 영화 상영회가 진행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반나절 동안 일했다. 관희는 검은색 보면대를 세워 놓은 것이 고작인 카운터에서 예매인의 이름과 번호와 인원수를 확인한 뒤에 표를 배부했고 나는 그 옆에서 영화 관람에 필요한 이어폰 장비를 배부했다. 각자의 이어폰을 통해 영화 소리를 듣는 식이어서 우리는 배우의 목소리라든가 배경음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스크린 반대편 벽에 기대서서 배우의 입 모양과 나뭇가지의 흔들림에 집중했다.
아주 캄캄한 밤이었다. 화면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남자의 옆모습을 끈질기게 따라가며 잡았다. 화면은 움직이는 남자를 계속 중앙에 두고 있어 마치 남자가 아니라 공원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객석에서 과자 봉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화면이 전환되었고 또다시 밤. 여자가 걷고 있었다. 계속 걷고 있는데 화면은 여자를 성실하게 따라가지 않아 여자는 프레임에서 자꾸만 사라졌다. 여자는 걷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 걷고, 그리고 사라졌다. 그때 관희가 처음으로 나에게 귤에 대한 거짓말을 해 주었다.
관희라는 가명을 쓴 적 있지만 제 본명은 귤이에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스크린 앞에는 오십 명가량의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오직 나만 그 거짓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후 우리가 사귀게 되었을 때 관희는 그 영화의 제목이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노인을 위한 개 이름>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몰래, 그렇지만 부지런히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나도 관희도 그런 얼굴이었으면 좋겠네. 우리는 어렵지 않은 얼굴로 이십 분가량을 잠자코 기다렸다가 창구에 갔는데 상병수당 신청용 진단서가 없어서 처리가 안 됐다. 그러면 오늘은 병원에 갈까? 관희에게 물어봤는데 상병수당 신청용 진단서를 발급해 주는 병원이 따로 있다고 했다. 지도 앱을 열어 검색해 보니 오늘 도착하게 되면 아슬아슬하게 진료 시간이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맨 뒤편 벤치에 누군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우리는 행여나 그 사람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 아주머니 자고 있네.
관희가 말했다.
희고 짧은 머리털. 펌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굽슬굽슬한 머리털을 가진 중년 여자였다. 한눈에 봤을 때는 꿈을 꾸면서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하거나 슬픈 꿈을 꾸고 있나 봐.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살그머니 다가가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아주머니는 생각 외로 가볍게 일어나 앉았다. 짧은 명상을 하고 일어나 다시 일에 복귀해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그러고는 머리를 개처럼 탈탈 털어 내기도 했는데 어지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아주머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생겨 먹기를 울 것 같은 얼굴로 생겨 먹은 듯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서는 미지근한 물 냄새가 났다. 항구 도시에 있는 오래된 건축물 냄새 같기도 했다. 빛을 받아들이거나 토해 낼 여력조차 없는.
저희랑 같이 걷고 돈을 주실래요?
내가 말했다.
응.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밖으로 나가자 거리가 젖어 있었다. 비가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실제로 지금도 비가 오지 않고 있는데. 빗물 고인 웅덩이에 비친 우리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우리는 쌍둥이 남매예요.
응.
얘는 귤이고 저는 감이에요.
응.
응 하고 아주머니가 대답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즐거워졌다. 오늘 일기에는 우리의 이야기 대신 귤과 감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겠네. 그래서 더 신중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근사한 이야기들로. 귤은 어린 시절부터 도박에 중독되어 꿈속에서도 한탕 하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요. 감은 중독에는 취약하지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잠을 잘 수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문득, 나는 아주머니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귤과 감 중에 하나가 물었다.
개.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뭐라고요?
귤과 감 중에 하나가 되물었다.
나는 오래전에 한 여자에게 끔찍하게 사랑받았단다. 그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이었지만 아주 아름다웠고 또 나에게는 한없이 온화했지. 그녀는 늘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리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그 희고 잘록한 목을 핥아 대는 걸 좋아했어. 아직도 냄새가 맡아지는구나. 항구 도시의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 이층집의 냄새가 말이야.
아주머니한테서는 진짜 냄새가 나긴 나요……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는 아랑곳 않고 진짜 무슨 냄새가 맡아지듯이, 그러니까 진짜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개였던 시절을 회상하듯이, 아니 진짜 그녀가 개인 것처럼 코를 발작적으로 끌어 올리며 킁킁거렸다. 관희와 나는 아주머니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관희와 아주머니와 나 순으로 손을 꼭 잡고 하천 쪽으로 걸어갔다. 관희와 나는 아주머니와 그녀의 그림자에게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니면 노인을 위한 개 이름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걸을 때마다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의 볼이 조금씩 불그스름해졌고 우리는 딱 그만큼 더 빠르게 걸었다. 빗물 고인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들리는 찰박찰박 소리를 즐거워하면서. 우리는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의 몸에 기댔다. 미지근한 물 냄새가 났다. 그림자에게도 물결이 있다니 그 사실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각자의 묽은 그림자를 신발로 닦아 내면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이상하지, 모두 상기된 얼굴로.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은 우리의 단골이 되었다.
살결을 만지면 부드럽고 팔뚝을 움켜쥐면 따뜻하다. 그리고 또 머리털도 있다. 쓰다듬으면 푸슬푸슬 소리가 나서 웃음이 날 것 같은 그런 머리털. 우리가 이야기하면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은 내향적인 개가 조심스럽게 짖듯이 응 하고 대답하고 우리는 만족한다. 그런 사람인가 개 앞에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사건건에 대해 불만이 있고 모든 사람에 대해 무람없는 녀석들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 우리는 건강하고 강한 사람이 된 것같이 느껴지기도 해. 우리는 어떤 개인가 사람과 일주일에 다섯 번 산책을 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십만 원. 관희는 아직까지 상병수당을 신청하지 못했다. 상병수당은 하루에 사만칠천 원. 그러니까 어떻게 계산해도 우리는 하루빨리 신청을 해야 하는데 왜일까 자꾸 미루게 된다. 이제는 신청 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진짜 가야 하는데 하면서 우리는 당장에 천천히 걷는 게 좋다.
강가에는 자유롭게 산책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선생님이 앉아 있어서 아이들이 아무리 타고 오르고 그 위에서 뛰어도 벤치는 넘어지지 않았다. 누구도 기르지 않는 새들이 벤치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선생님은 가만히 앉아서 빵을 조금씩 떼어 먹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주워다 선생님께 선물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이 손을 벌려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면 선생님이 손짓을 하며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바나나 차차 바나나 차차 하는 구절이 의미 없이 반복되는 노래를 부르며 새들과 함께 경쾌하게 흩어졌다. 아이들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마다 붙잡고 말을 걸었다. 그중 두 아이가 개를 위한 노인 이름에게 슬며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왈왈이.
왕왕이.
두 아이가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의 티셔츠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우리는 검고 둥근 개를 찾고 있어요.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이 무릎을 굽혀 두 아이가 자신의 울 것 같은 검은 눈을 실컷 볼 수 있도록 쪼그려 앉았다. 나랑 관희는 왠지 물러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몇 걸음 멀어져서 그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우리는 둥글고 검은 개를 찾고 있어요.
두 아이가 말했다.
웅크려 앉아 보겠니?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이 말했다. 두 아이는 개를 위한 노인 이름과 마주 보고 웅크려 앉았다.
나 아주 예전에 비슷한 장면을 봤어.
관희가 말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 말이야. 바닥에 이마를 대고 오래오래 절을 하다가 잠에 들어 버렸어. 그러자 내가 정원에서 걸음마를 떼고 있었어. 거기엔 검은 개만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어. 검은 개는 나에게 걷는 법을 알려 주었고 나는 개를 산책시켜 주었어. 그리고 개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어. 다시 잠에 들면 그 개를 만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거야.
우리는 웅크린 채 자신들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는 세 명인가 세 마리를 몇 분이고 지켜보았다.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은 때때로 그림자로 착각되고 그림자는 때때로 검은 개로 착각되기도 했다. 개를 위한 노인 이름에게도 아이가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 줄 거야. 너는 모르지? 우리가 너네 엄마랑 얼마나 재밌었는지. 이런 말들은 이 여름이 지나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여름은 너무나도 길어서 지나가지 않을까 봐 걱정이 돼.
나에게도 검은 개가 있었다.
내가 열 살 때쯤인가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살 때의 일이다. 그 사람들이 하던 사업이 망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를 다른 친척 집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대체 왜? 나는 그 사람들이 나랑 같이 살 수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생활력이 부족해서 나를 감당하지 못한 거라고 믿으면서 그 사람들 곁을 떠났다. 여하튼 그 시절 나와 부모는 메일을 주고받았다. 엄마는 개를 하나 기르기 시작했는데 개를 정말 사랑하고 개도 엄마를 정말 사랑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여름 방학 때 엄마 아빠네 집에 잠시 놀러가 본 적이 있다. 그때 본 개는 엄마와 함께여서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눈으로 알았어. 개는 엄마와의 생활을 지겨워하고 있었다. 내가 몇 번 개의 가슴팍을 확 밀어 본 적도 있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왈왈. 말하라고. 왕왕.
개는 얼마 안 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내 생각에 엄마가 개를 한 번도 산책시키지 않은 탓이었다. 개가 거의 죽어갈 때쯤에는 온 집 안이 어떤 냄새로 가득했다. 내쫓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내가 무력해지는 냄새. 개가 이를 세우고 으르렁거릴 때면 나는 생각했다. 개가 두려워하는 건 그 무엇도 아니고 자신에게서 나는 바로 그 냄새라고.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엄마 아빠는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개가 죽었을 때는 한밤중이었고 아빠가 개의 몸에 손을 올려 두고 말했다. 아직 여기에 있어. 내가 뭐라고 하려고 하니까 아빠가 나를 눈빛으로 저지했다. 엄마가 개의 몸에 엎드려 흐느꼈다. 아빠는 엄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뭘 하는 거지 이 멍청이들? 아직 여기에 있다니 뭘까. 대체 무슨 말일까. 개의 등허리를 만져 보니 따뜻하기는 했다. 그러다 나는 울음이 나고 말았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 멍청해서 그만 슬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은 우리에게 더 이상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나는 종종 앱을 열어 그녀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녀에게 온 메시지는 없었고 대신 개 산책을 원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최근에는 광고를 보고 연락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사실 광고를 올려 두었다는 사실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리가 앱에 올려 둔 광고문은 이것이었다. 개가 아니라 사람과 산책을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개를 산책시켜 줬으면 한다고 했다. 이 일을 해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오늘은 관희가 아침부터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서 나 혼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왠지 그 사람들이 우리를 엿 먹이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엿 먹이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괜찮은 사람들일지도 몰라.
그래도 관희가 없으면 싫어.
내가 말하자 관희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러자 모든 게 괜찮아졌고, 그런 괜찮음은 언제나 잠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 괜찮아졌다. 맞아. 그 사람들은 어쩌면 괜찮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가끔은 혼자 산책을 해 보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마음이 정리되었다.
거대한 얼굴 동상 앞에 젊은 부부와 개 전용 유아차가 서 있었다. 아내는 털이 구불구불한 갈색 개를 안고 있었다. 아내는 만삭이었고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동그래서 안정적인 안경테. 남편은 한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나에게 개를 넘겨주지도 않고 또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그냥 유아차를 내 쪽으로 슥 밀었다.
나는 유아차를 정말로 계속해서 밀었다. 젊은 부부는 나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아니면 개의 유아차를 왜 내가 밀고 있을까. 왜 개를 유아차에 태우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이 빠졌다. 남편이 내 오른쪽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남편은 어깨 좀 펴고, 하면서 나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릴 뿐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쳐다보았을 때 남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잠깐 반짝였다. 남편은 곧바로 손을 내렸지만 나는 반지가 반사하는 빛을 곁눈질로 자꾸 쳐다보면서 어지러워졌다.
강가는 한산했고 쭉 뻗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숨이 찼다. 나는 이 사람들이 화가 났을까 봐 걱정이 됐다. 관희야, 이 사람들이 화가 나면 나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할 거야. 나는 유아차의 차양막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내가 이 부부를 화나게 만든 걸까? 그런 생각을 조금 하다가 관뒀다. 왜냐하면 젊은 부부는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평온함을 보았다.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가 안정적이고 균일한 방식으로 회전할 거라는 믿음 같은 것. 나는 점점 빨리 걸었고 젊은 부부와 개는 조금씩 나와 멀어졌다. 나는 종종 뒤를 돌아 그들을 바라보았고 남편이나 아내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은 입술 끝을 살짝 끌어 올리거나 눈짓을 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예의를 표시했다.
나는 관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맞아 관희야. 저 사람들은 정말 괜찮은 사람들일지도 몰라. 이윽고 나는 약간 슬퍼졌다. 저 사람들의 선량함이 어떻게 나를 슬프게 만들 수 있는 걸까? 햇빛 때문에 이마가 따가웠고 또 땀이 났다. 땀을 흘리면서 나는 점진적으로 슬퍼졌다. 나는 가속적으로 빨리 걷고,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 사람들과 개가 조금씩 멀어져 있는 식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계속 강가를 따라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바나나를 한 송이 생수를 한 병 샀다. 집까지는 거리가 약간 있었고 바나나와 생수는 걸을 때마다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너무 무거워서 좀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는 관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관희는 빛 아래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무심할 정도로 같은 보폭 같은 리듬으로. 그래서 내가 천천히 걸으면 관희가 멀어졌다. 빠르게 걸으면 관희와 가까워졌다. 내가 그런 식으로 관희와의 거리를 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건 관희에게 서운한 것도 나 자신에게 서운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가 이렇게 걸을 수도 있고 저렇게 걸을 수도 있다는 그 사실이 서운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관희가 집 앞 편의점으로 쏙 들어갔다.
편의점의 통창으로 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건물 앞에 가로수가 있어 여기저기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협소한 빛 아래,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삼각김밥 씹는 관희. 저거 언제 삼키는 건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겹게 우물우물 씹다가 또 한 입을 먹고 또 우물우물…… 관희야, 나는 그냥 그게 보기 싫었던 거야. 삼각김밥 씹는 관희를. 관희야, 너는 더 건강한 걸 먹어야 해. 네가 그런 거 먹는 거는 나는 별로야. 나는 관희를 못 본 척 혼자 집으로 향했다.
방 한가운데 뜯지 않은 택배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의 가슴통만 한, 그러니까 그리 크지 않은 부피의 상자. 보낸 사람을 확인해 보니 관희가 다니던 공장이었다. 관희가 집에 들여다 놓고 다시 나간 모양이었다. 방 한쪽으로 치워 두거나 뜯어보아야 할 것 같았지만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뭔가 각오가 필요할 것 같았는데 그게 어떤 각오냐면 무거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빛으로 가득한 상자를 흔들어 볼 때의 각오 같은.
관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만큼 관희도 지쳐 있었다. 관희는 양치를 하고 침대로 스르륵 기어들어 갔다. 오늘 관희가 먹은 것에 대해 좀 혼내 줄까 그러지 말까 고민했다. 그러지 말자. 관희도 오늘 병원에서 많이 힘들었으니까. 병원에서의 일들은 지겨운 걸 알아. 의자에 앉아 멍하니 기다리는 거잖아. 그런데 관희의 이름은 한참을 안 불리고 그래서 혹시 자신의 존재가 누락된 건 아닌지 걱정하고. 간호사에게 가서 물어보려고 해도 관희에게 대답을 해 주기에는 너무 바쁘다. 진료를 받고 나서는 또 다른 층으로, 또 다른 층으로…… 관희는 그런 것들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관희야, 나도 오늘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 관희는 상상할 수 있어? 강가를 혼자 걷는 나를.
나는 침대 쪽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관희 위에 올라타서 관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관희의 얼굴은 지쳐도 귀엽지만 그런 얼굴은 보기가 힘들다. 근육에 힘이 없어서 눈꺼풀이 닫힐 듯 말 듯 한, 차라리 잠들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그런 얼굴. 나는 그런 선명한 얼굴을 견디기 힘들어서 관희에게 뽀뽀를 했다. 그러다 문득 관희에게 말해 버린 것이다.
아이를 가지는 건 어떨까?
관희가 나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관희. 관희가 바라보는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인지. 우리 얼굴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그런 것들은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째서?
관희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째서? 한 번 더 물었다. 하지만 나도 알아. 우리가 함께 사랑하기에 이 집의 규모는 너무 작다. 그렇지만 나는, 관희랑 아이랑 개랑 함께 살면서 크고 흰 집에서 오래오래 바닥을 닦으면서 희게 헌신하고 싶어. 헌신하면서 살고 싶어. 맞아, 우리는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매일 아침에 거울을 보는 일,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너도 나도 모르지만 실은 눈치챘지만 네가 너에게 내가 나에게 숨기고 사는 것처럼. 일기 쓸 때 눈물 나는 표정이 되는 것처럼. 엉엉 울다가도 거울이 나를 쳐다볼 때 그만 눈물을 뚝 그치는 것처럼.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네가 죽는 건 싫어.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고 조금 있다가 콧물도 흘렀다. 그러자 관희가 휴지로 콧물을 슥 닦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콧물이 흘렀다. 관희가 자꾸 닦아 주니까 콧물이 또 나잖아. 콧물이 나니까 관희가 닦아 주고. 관희가 닦아 주니까 콧물 나는 건 좋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눈물이 그치고 콧물만 나왔다. 관희야, 또 닦아 주라. 또…… 그러다가 나는 잠에 들었다.
밤중에 일어났을 때 관희는 어둠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관희는 공장에서 배달 온 상자를 온몸으로 꽉 안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빛이 가득 들어 있어서 조금도 새어 나오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나는 관희 곁으로 가서 관희의 가슴 부근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관희와 나 중 한 명이 말했다.
삶이 빛으로 가득하다는 게 무섭지 않아?
무겁냐고?
아니 무섭다고.
관희와 나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바닥에 넘어뜨려서 깔아뭉개 버렸다.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관희가 위에 올라타게 되었다. 맞다. 관희의 몸이 가슴을 꾹 짓누르는 감각이 무겁고 좋다. 좋고 무겁다. 아아. 맞아. 관희는 무겁다. 우리는 콘돔을 뜯어 바닥에서 한참을 뒹굴고 모든 게 끝나고 나서는 관희를 꼭 안고 눈 감았다. 빛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웅크려 자는 꿈을 꿨다. 빛이 점점 무거워져서 환하게 잠에서 깼을 때, 나는 너무 춥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걷다가 거대한, 여전히 너무나 거대해서 지쳐 보이는 얼굴 동상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한 손에 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나머지 한 손에 설탕 묻은 꽈배기를 들고 있었다. 베어 문 흔적은 있었지만 아이는 더 이상은 먹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멀뚱히 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아이가 왜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엄마가 여기에 있으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리 엄마는 어디에 갔어요?
여기에 있으라고 했다며.
내가 말하자 아이가 눈알을 몇 번 굴렸다.
한 시간 전에요.
관희랑 나는 잠시간 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내가 먼저 맞다, 하고 말했다.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 가서 일기에 쓰면 돼.
저 일기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요.
자, 일기를 연습해 보자. 이렇게 쓰는 거야. 엄마랑 술래잡기를 했다.
내가 말하자 아이는 잠자코 있었다.
얘, 따라 해야지. 엄마랑 술래잡기를 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일기를 쓸 때는 글자로 써야 해.
관희가 말했다.
엄마랑 술래잡기를 했다.
아이가 말했다.
그렇지. 우리도 쓸 것이다. 관희야, 오늘 쓸 일기의 내용을 미리 생각해 볼까. 거울과 손을 잡고 강가를 걸었다. 거대한 얼굴 동상 아래서 꼬질꼬질한 아이를 보았는데 귀엽게 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곧 엄마가 찾으러 와서 귀여운 우리 공주님, 하고 아이의 얼굴이 구겨지도록 꼭 안아 주었지. 그리고 옆에는 하늘색 하네스를 한 개도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해서 만지면 웃음이 날 것 같은 그런 개. 엄마는 딸을 안아 들어 그녀의 차로 우아하게 걸어갔고 개는 엄마와 딸을 따라가다가 문득 우리 쪽을 돌아보고는 내 상상만큼 아름답게 짖었다. 우리는 그놈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가서 관희의 상병수당을 신청하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습한 바람이 불고 나는 재채기를 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병든 것이 아닐까 근심하고 또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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