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서강대 교수 |
한대수(사진)를 만났다. 아니, 한대수 선생을 만났다. 그도 어느덧 칠십대 후반이다. 신촌 어느 거리의 허름한 간이 횟집에서다. 나는 대학원생들과 종강 호프타임을, 그는 젊은 여성 두어분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워낙 유명한 분이라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끔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조용히 다가가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는 쾌히 동의했다. 기분이 좋았다.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 한대수 선생과 사진을 찍었다고 자랑했다. 그는 우리 세대에게는 이른바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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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덟명이나 되는 대학원생들의 반응은 조용하다. 한명이 조심스레 말한다. 한대수가 누군데 교수님께서 흥분하고 좋아하시느냐는 것이다. 순간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아니 한대수를 모르다니.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못 부르는 노래를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다.
사실 한대수의 대표곡인 ‘행복의 나라로’는 한국 포크 음악 역사상 손꼽히는 명곡쯤 된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는 가사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는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그럼 대한민국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냐?”라는 게 그 이유다.
그날 술자리에서 나는 깨달았다. 늘 얘기하는 정서적 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송년 저녁으로 간이 횟집은 만원이었다. 그러나 수십 명이나 되는 젊음 그 누구도 한대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오늘날 세대 간의 문화적, 정서적 차이는 이처럼 심각하다. 술자리가 파하고 혼자 신촌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아아 나는 살겠소/태양만 비친다면/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혼자 가만히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었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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