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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 (금)

“95세 나이에 부상 입고도 집짓기 봉사”…故 지미 카터에 쏟아지는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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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각) 100세의 나이로 별세한 가운데 주요 외신은 연이틀 카터 전 대통령의 업적을 추모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등 재임 기간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퇴임 후 평화 해결사로 활약하면서 2002년엔 국제 갈등 해결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워싱턴포스트(WP) 등은 카터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이틀째인 30일 미 해군에 복무했고, 가족 농장을 운영했으며, 일요 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미국 대통령이 된 카터 전 대통령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례로 해비타트 인지도를 높이고,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성을 유모로 고용한 일화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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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전 대통령(오른쪽)과 로절린 카터 전 영부인이 2007년 5월 21일 루이지애나 바이올렛에서 해비타트 운동을 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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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임 후 목공 기술 제공…”해비타트 인지도 증진”

카터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한 지 4년 후인 1984년, 열악한 조건의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비정부기구인 해비타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과거 저서를 통해 “1984년 뉴욕을 여행하던 중 맨해튼에 있는 해비타트 작업 현장을 방문했고 자원봉사자들이 오래된 건물을 수리 중이었다”며 “반쯤 농담조로 목공 기술을 빌려줘야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유년 시절부터 목공 기술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카터 전 대통령은 조지아에서 자원봉사자 그룹을 조직하고, 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해비타트 현장으로 왔다. 카터 전 대통령과 고(故) 로잘린 여사는 낮에는 자원봉사자들과 일하고, 밤에는 근처 교회에서 자면서 봉사했다.

이후 해비타트는 “지미 앤 로잘린 카터 워크 프로젝트’(Jimmy and Rosalynn Carter Work Project)라는 이름을 붙여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매년 미국이나 해외에서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끌어모았다. 그 덕분에 2006년 인도에서 실시한 해비타트 프로젝트에는 발리우드 스타는 물론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 등도 참가했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는 35년 이상 14개국에서 10만4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와 협력해 약 4400채의 주택을 짓고 수리했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는 해비타트를 위해 기금을 모금하고 전 세계 공무원들과 협력하는 것을 도우면서 해비타트에 힘을 보탰다. 조나단 렉포드 해비타트 최고경영자(CEO)는 “해비타트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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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0년 1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포르토프랭스에서 남쪽으로 33km 떨어진 레오간에서 짓고 있는 주택 건설 현장을 방문한 모습. /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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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비타트는 1976년에 설립됐다. 카터 전 대통령이 공화당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를 물리친 해다. 하지만 1기 임기를 마친 카터 전 대통령은 공화당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을 상대로 재선에 실패한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가 1984년 해비타트에 동참하면서 1991년까지 건설되거나 재건축된 주택은 1만 호에 달한다. 해비타트 설립부터 1984년까지 건설한 주택(342채)의 약 2.5배다.

카터 전 대통령은 95세였던 2019년, 내슈빌에서 마지막으로 해비타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전날 집에서 넘어져 14바늘을 꿰매고 눈과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현장에서 목공을 하고 페인트칠했다.

WSJ는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의 목공 기술을 제공하고 기금을 모아 해비타트의 인지도를 높였다”며 “카터 전 대통령은 해비타트가 미국과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을 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생활 조건을 개선했다”고 평가했다.

◇ 살인 혐의 유죄 판결받은 여성, 막내딸 유모로 받아들여

카터 전 대통령의 성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는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성을 백악관 유모로 고용한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가 메리 프린스(개명 전 이름은 메리 피츠패트릭)를 처음 만난 것은 프린스가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조지아 주지사 관저에서 일하도록 배정받은 후였다. 젊은 흑인 여성이었던 프린스는 낮에는 카터 전 대통령의 막내딸이었던 에이미 카터의 유모로 일하고 밤에는 근처에 있는 교도소로 돌아갔다.

카터 전 대통령이 1976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카터 전 대통령 부부는 프린스에 워싱턴DC로 함께 갈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카터 전 대통령 부부는 조지아 가석방 위원회에 프린스가 백악관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유예를 요청했고, 카터 전 대통령이 프린스의 가석방 관리자로 지명된다. 이후 프린스는 카터 전 대통령의 임기 동안 백악관에서 일하면서 에이미와 함께 국빈 만찬 등 모든 곳에 참석했다. 프린스는 에이미의 학교 행사에 참석했고 수영 레슨을 감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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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좌)와 부인 로잘린(우)과 가족이 1979년 3월 26일 백악관에서 가족 사진을 촬영했다. /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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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는 조지아 남서부에서 가난하게 자란 사람으로, 1970년 조지아 럼프킨의 한 술집 밖에서 말다툼하던 중 한 남자를 총으로 쏴 살인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프린스는 이후 사촌의 총이 실수로 발사됐다고 했고, 목격자는 프린스가 사촌을 변호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증언했다. 프린스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 법정에서 지명한 변호사를 단 한 번 만났고, 변호사는 감형을 조건으로 유죄를 인정하도록 설득했다. 대신 프린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프린스는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주지사 관저에서 일했다. 조지아 등 미국 남부 주의 주지사 관저에서 수감자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오랜 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로잘린 여사는 회고록에서 “가족을 위해 일한 여성 수감자로부터 사법 제도의 부적절함과 불평등에 대해 배웠다”며 “프린스는 젊고 흑인이며 돈도 없었기 때문에 변호사의 말대로 했다”고 했다.

현재 70대 후반인 프린스는 지난 2002년 애틀랜타의 한 지역지에 “카터는 제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로잘린 여사는 “그가 당신의 친구라면 당신은 평생 친구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WP는 “프린스는 조지아 수감자에서 에이미 카터의 백악관 유모가 됐다”며 “카터 전 대통령이 아닌 현대의 대통령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정미하 기자(viva@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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