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캘리포니아에서 개울물을 걸러 금을 채취하는 사람들. 위키피디아 |
미국-멕시코 전쟁(1846년 4월~1848년 2월) 당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변방이었다. 당시 캘리포니아 인구는 약 15만 명. 대부분 원주민이었고 스페인-멕시코계 주민이 약 6,500명, 외국인인 미국인은 700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들은 주로 멕시코 정부가 허가한 목장에서 일했다. 황금은 저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기 직전인 1848년 1월 24일 처음 발견됐다. 골드러시 당시 그곳은 '주인 없는' 땅이었다.
6월 초 한 남성이 황금이 든 병을 흔들고 다니며 자랑하면서, 술집과 상점들이 텅 비기 시작했다. 광부 2명이 7일 동안 수만 달러어치를 캤다는 등의 소문은 이내 서부를 넘어 하와이와 멕시코로, 동부 뉴잉글랜드를 거쳐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1848년 12월 연두교서로 그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수많은 이가 집을 저당 잡혀 목돈을 마련해 서부로 떠났다. 아편전쟁 이후 살길이 막막해진 중국인도 그 행렬에 가세했다. 1849년 캘리포니아 인구는 순식간에 10만 명으로 늘었고 50년대 중반 30만 명을 넘어섰다. 영미권 백인들의 텃세는 가히 무법적이었다. 그들은 이민자와 원주민들을 내쫓거나 자릿세를 요구했고 강도와 살인도 일삼았다. 당시 실상은 에르난 디아스의 소설 ‘먼 곳에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금 채굴량은 1849년 당시 기준 약 1,000만 달러어치를 시작으로 이듬해 4,100만 달러, 51년 7,500만 달러어치로 늘어났고, 1852년 8,100만 달러어치로 절정을 이뤘다.
강 모래를 채에 걸러 금 조각을 줍던 방식은 50년대 중반 서서히 한계에 도달하면서 거대 자본에 의한 지하 암석 파쇄 방식 채굴로 전환됐다. 1884년 법원이 경관 훼손과 하천 오염 등을 이유로 수압 채굴을 규제하기까지 광산 자본가들은 1억7,000만 달러어치의 금을 추가로 캤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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