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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 (금)

대통령 4년보다 빛난 퇴임후 43년, 세계평화 중재 ‘Mr. 픽스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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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최고 전직대통령’ 지미 카터 별세]

‘정직’ 앞세워 대통령 오른 ‘땅콩 농부’… 재임중 ‘중동 평화협상’ ‘中과 데탕트’

퇴임 뒤 ‘해비탯’ 봉사로 인생 2막… 세계 인권-평화에 헌신 ‘노벨평화상’

바이든 “국민의 종” 트럼프 “감사의 빚”

동아일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부인 로절린 여사가 2007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루이지애나주 바이올렛에서 안전모를 쓰고 ‘사랑의 집 짓기(해비탯)’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바이올렛=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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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는 신(神)과 국민의 겸손한 종(從)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간)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이렇게 추모했다.

향후 30일간 미 국내외 관공서에 조기를 게양하고 내년 1월 9일을 ‘국가 애도일’로 정해 그를 추모하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또한 “카터는 모든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고 애도했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언론도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정치적 양극화와 이념 대립이 심한 미국 사회 전반에서 이처럼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거운 것은 그가 퇴임 후 더 빛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39대 미 대통령으로 활동했던 카터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정치인으로는 젊은 나이인 57세에 ‘백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돌며 민주주의, 인권, 평화, 기아 퇴치 등에 헌신하는 바람직한 ‘인생 2막’을 열었다. 이제는 누구나 그를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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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통령이 된 ‘땅콩 농부’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땅콩 농장을 운영하던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았다.

1946년 결혼한 부인 로절린 여사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뒀다. 지난해 11월 로절린 여사가 사망할 때까지 77년간 해로했다. 둘은 가장 긴 결혼 생활을 유지한 미국 대통령 부부다. 부인의 추모 예배 당시 “당신을 볼 때마다 나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신혼 시절 편지도 공개했다.

연방 상하원 의원 경력이 없고 조지아 주지사만 지낸 그는 워싱턴 정계의 아웃사이더였다. 이런 그가 세계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은 국민들에게 ‘정직’, ‘상식’ 같은 보통 사람의 가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대선 유세 당시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강조한 것은 ‘정치인 카터’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재임 중 주요 성과로 중동 평화협상 중재, 중국과의 관계 개선(데탕트) 등이 꼽힌다. 1978년 그는 미 대통령 별장이 있는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 협상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잠시 점령했던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줬고, 한 해 뒤 이집트는 아랍국 최초로 이스라엘과 수교했다.

하지만 오일쇼크 여파로 집권 초 6.5%였던 소비자물가가 3년 후 13.5%로 치솟자 민심이 돌아섰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수도 테헤란의 주이란 미국대사관에 미국인 52명을 444일간 억류했다. 최강대국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힌 이 사건으로 ‘강한 미국’과 ‘경제 성장’을 강조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백악관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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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누비며 평화 중재한 ‘미스터 픽스 잇’

자연인이 된 그는 1982년 비영리재단 ‘카터센터’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세계 곳곳을 돌며 민주주의, 인권, 기아 퇴치에 앞장섰다.

특히 저소득층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해주는 ‘해비탯(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7년에는 93세 고령으로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에서 집 짓기 자원봉사를 하던 중 탈수증으로 쓰러졌다. 그는 해비탯 재단과 함께 전 세계 14개국에서 4447채 이상의 주택을 건설, 수리했다. 집을 지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외교 협상 막후에서 해결사 겸 중재자로도 나섰다. 북한,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분쟁지에서도 ‘평화 중재자’로 활약했다. 덕분에 ‘사태를 정리한다’는 뜻의 ‘미스터 픽스 잇(Mr. Fix it)’으로 불렸다. 말년에는 흑색종 투병 등으로 대부분을 플레인스 자택에서 보냈다. 지난해 2월부터 호스피스 돌봄 치료를 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 1월 초 수도 워싱턴 의회에서 거행될 장례 행사에서 직접 추도사를 낭독하기로 했다. 미 대통령의 국장은 2018년 타계한 조지 H 부시 전 대통령 이후 7년 만이다.

워싱턴=신진우 특파원 niceshin@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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