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 편집국장대리 |
멀쩡하게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 계엄령 선포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태였다. 괴담인 줄 알았던 계엄을 현실에서 맞닥뜨리면서 국민은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로 바뀌는 초현실적인 세상을 경험했다. 그런데 초유의 계엄과 뒤이은 탄핵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묻힌 게 있다. ‘적대시(敵對視) 탄핵’이다. 자칫하면 ‘대북 적대시 정책’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 사유로 박제될 뻔했다.
■
상상 초월 계엄, 탄핵 불가피하나
대북정책 문제 삼는 건 어불성설
‘대북 적대시 정책’ 금기됐을 뻔
지난 14일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불가피했다. 윤 대통령은 계엄의 명분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걸었지만, 계엄과 자유민주주의는 애초 함께 어울릴 단어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군사계엄을 강행한 대통령은 그 책임을 져야 했고, 스스로 하야하거나 아니면 탄핵당하는 두 선택지만 있었다. 단 당초 윤 대통령 탄핵안에 ‘적대시’가 포함됐던 게 숨은 함정이었다.
6개 야당이 앞서 4일 발의했던 첫 탄핵안엔 “소위 가치외교라는 미명 하에 지정학적 균형을 도외시한 채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하며 일본에 경도된 인사를 정부 주요 직위에 임명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는 평가가 담겨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두 번째 탄핵안에선 이를 뺐다. 민주당 관계자는 “적대시 문구는 우리가 포함한 게 아니다. 새 탄핵안에선 이를 뺄 것”이라고 해명했고, 지난 14일 국회를 통과한 탄핵안에선 해당 문구가 빠졌다. 당초 이 문구는 조국혁신당에서 먼저 공개했던 탄핵안에 들어 있었는데 야 6당의 첫 탄핵안에 그대로 반영됐다고 한다.
‘지정학적 실리 외교 대신 북·중·러를 상대로 강경 외교만 구사했다’는 비판이라면 야당으로서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정책 평가를 뛰어넘어 ‘가치외교’와 ‘적대시’를 명기한 탄핵안이 통과됐다면 향후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심각한 역풍을 부를 수 있었다.
외교 용어로 본다면 가치외교는 한미동맹의 또 다른 표현이다. 지금까지 양국이 쌓은 군사동맹, 경제동맹을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공유하는 가치동맹으로 더 밀도를 높이자는 취지다. 즉 ‘소위 가치외교라는 미명’은 한미동맹에 경도됐다는 감정적 주장이 담겨 있다. 더 민감한 건 ‘적대시 정책’이다. 남북 관계에서 북한을 적대시했다는 ‘대북 적대시’의 저작권은 북한에 있다.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일관되게, 끊임없이 주장해온 구호가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다.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 공갈을 끝장내는 것”(2018년 김계관 제1부상 담화), “종전을 선언하기에 앞서…적대시 관점과 정책부터 철회해야”(2021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설), “부질없는 반공화국 적대시 정책의 수치스러운 패배”(2023년 김 위원장 연설), “대조선 적대시 정책 포기에 미국이 응하지 않는 조건에서…우리는 압도적 핵억제력 구축에 박차를 가할 것”(2023년 김여정 부부장 담화) 등 북한의 대미, 대남 메시지에서 적대시는 무수히 등장한다.
그래서 대북 적대시는 무색무취의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남북 관계에서 북한이 고수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는 북한이 원하는 한반도 해법을 받아들이는 걸 전제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논리가 깔렸다. 북한이 지목해온 대표적인 대북 적대시 정책은 군사적으론 한미 군사훈련, 미국의 핵우산 제공, 경제에선 대북 제재 등이다. 북한이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통해 구현하려는 한반도의 미래는 한미 군사동맹 해체와 핵보유국 북한이다. 북미 대화는 핵 보유를 전제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 이를 위한 밑자락이다.
민주당이 ‘적대시’를 두 번째 탄핵안에선 제외한 건 미국 조야의 비판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탄핵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 내 주류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인식은 한국 국민의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부차관보는 본지에 “윤 대통령은 국민의 위임을 명백히 상실했고, 더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그는 “탄핵안에서 민주당은 윤 대통령과 정부가 대일 관계를 개선하고 한·미·일 삼자 협력을 구축한 것을 비난하며 자신들의 통치 의도를 드러냈다”고 우려했다.
초유의 계엄 시도에 직면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건 탄핵 여부에 대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탄핵소추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결정에 ‘소위 가치외교’와 ‘적대시 정책’이 들어간 건 어이없는 끼워 넣기였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적대시’가 담긴 탄핵안이 통과됐다면 향후 ‘대북 적대시 정책’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삼가야 할 금기로 기록될 뻔했다.
채병건 편집국장대리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