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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오늘과 내일/서영아]한 시대가 끝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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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100년 가까운 일생 중 74년을 언론인으로 산 일본 요미우리 신문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1926∼2024) 전 주필의 타계 소식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2000년대 초반 그를 다룬 ‘언론과 권력’이라는 책을 읽었다. 평기자로 입사한 그가 승승장구하면서 요미우리를 1000만 부 발행 규모의 신문사로 키우고 ‘미디어의 제왕’이 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한 책이다.

일본 정언유착의 대명사

제2차 세계대전 때 반(反)군국주의 소년, 도쿄대 학생 시절 공산당 지역 책임자였던 와타나베는 공산당을 탈퇴하고서도 여기서 배운 전략적 사고를 평생 간직했다. 1950년 당시 신문업계 3위였던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1, 2등 신문사보다 규모가 작아야 정상에 오르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쿄대 시절 절친이던 우지이에 사이이치로(氏家齊一郞)에게 입사를 강권해 훗날 사내정치에 힘을 보태게 했다.

‘나베쓰네’라는 통칭으로 불리며 언론과 정치판을 쥐고 흔들던 그의 비결은 치밀한 인맥 관리였다. 정치부 기자 시절 자민당 2인자였던 오노 반보쿠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정계의 정보를 얻어 미디어를 관리했다. 한일관계 막전 막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노를 이용만 한 것은 아니다. 오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정부를 위해 고인의 뼛조각을 몰래 훔쳐다 줄 정도로 세심하게 충성을 바쳤다.

이런 그가 미국 워싱턴 지국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웬만하면 견문을 넓힐 기회로 반길 만도 했지만, 그는 유배당한 것처럼 괴로워했다.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본사 정치부와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영향권에서 떠난 부하를 체크하기도 했다. 이 시절 신경안정제나 위장약 등을 달고 살았다.

마키아벨리즘에 심취했던 그는 사내 권력투쟁에서 자기 사람이 아닌 기자는 철저하게 짓밟았고,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기자는 파격적으로 키워줬다. 주변에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굳이 시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처리해 주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자신을 앞지르는 일도 용납하지 않았다. 절친 우지이에가 그보다 먼저 차기 톱으로 부상했지만 사주로부터 오해를 사 1982년 계열사인 니혼TV 부사장으로 ‘좌천’(당시의 개념이다)되기도 했다. 그 뒤 우지이에는 2011년 니혼TV 회장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의 패러디 단편집 ‘촌장선거’에는 그를 모델로 한 다나베 미쓰오(78)가 등장하는 챕터(‘오너’)가 있다. 고령의 권력자인 그는 권력의 종말을 뜻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패닉장애를 겪으면서도 현직에서 떠날 줄 모른다. 낮이건 밤이건 환한 방에서 지내며 잠도 자지 않았다. 권력자에겐 혼자 남겨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실제 와타나베는 사망 직전까지 병원 침상에서 현직 주필로서 사설을 점검했다. 98세 주필을 모신 신문사나 그 자리를 지켜낸 와타나베,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까지 현직 지킨 권력의 화신

한 해가 저물고 나라를 뒤흔드는 소식들에 황망함을 느끼는 요즘, 개인적으로는 한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상당수가 감옥행으로 끝나는 제왕적 대통령제, 그것을 만들어낸 1987년 체제가 종언을 고할 때가 됐다. 당시 청년 학생과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시대정신은 자기 손으로 직접 국가 리더를 뽑는다면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쏠리고 여러 부작용을 낳는 구조가 탄생했다.

와타나베의 타계 소식은 과거처럼 언론과 정치를 소수가 막후에서 주무르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제왕적 권력이 세상을 좌우하는 일을 더 이상 용인해선 안 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정말 한 시대가 끝났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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