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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인류학자 전경수의 세상 속으로] "기쁘게 감사히 산다" 낙인을 이겨내는 한센인들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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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형'의 섬, 소록도
자식 낳고 일도 하며 일상 살지만
나환자 꼬리표에 이승과 '절연'
그곳 교회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


파이낸셜뉴스

소록도에서 만난 김기현·김복화 부부와 필자(왼쪽 사진 왼쪽 첫번째부터). 장기진씨의 손톱을 깎고 있는 간호조무사. 장씨는 경북 청송 태생으로 지난 1941년에 입도했다. 전경수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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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형(天刑)'을 받고 '이승'을 떠나온 사람들이 전남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육지와 이별한다. 이승과의 인연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사는 섬, 소록도. 부처님 말씀에 생즉고(生卽苦)라 했다. 이승과 절연한 사람들에게는 이승의 고(苦)가 없을 수 있다. 그 대신에 이승의 사람들이 붙여준 낙인이 있다. 완치된 경우에는 약을 먹지 않는다. 40년 넘게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한센인'으로 분류되고 있다. 부모가 환자이지만, 그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은 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격리시키면서 '미감아'라고 불렀다.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 마치 감염되기를 기다리기나 하듯이.

그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용어로 설왕설래한다. 나환자면 어떻고 한센인이면 어떤가.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결핵에 걸렸던 사람이 완치 뒤 '결핵인'이라고 지칭되는가? 치질에서 완치된 사람을 '치질인'이라고 호칭하는가? 미셸 푸코(1926~1984)는 '구분이 차별의 시작'이라고 했다. 의학적 치료가 완료되면 원상복귀되는 게 당연하다. 나처럼 키다리도 홀쭉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다. '다문화'라고 구분하는 용어가 당당하게 행정용어로 고착되는 현실이 장래에 몰고 올 혼란과 위험의 문제가 불을 보듯 뻔하다. 구분이 불필요한 상황에서 세분한 결과를 구체성의 오류라고 한다. 오류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데는 다른 저의가 있다. 일정기에도, 군정기에도 그랬다.

인간의 삶이 얼룩지는 흑역사 생성의 이유가 살림살이의 진행 과정에서 개입되는 억압과 차별에서 비롯된다. 인류학자는 지독한 경험주의자다. 우리 내부에 축적된 억압과 차별의 관성을 공부할 목적으로 전남 고흥군에 속해 있고, 국립소록도병원(이하 병원)을 중심으로 직원마을과 환자마을로 구성된 섬에 들어갔다. 15년 전 2주일간 '소록도 섬살이'의 신세를 졌다. 환자마을은 7군데에 504명(78.5%), 4개 병동에 138명(21.5%) 총 642명이 살고 있는 속칭 '소록도 나환자촌'이다. 병원의 협조와 원생자치회의 허락을 얻어서 세대 및 병실 방문과 마을 생활에 대해 배움의 기회를 가졌다. 병원 규칙에 의해 일반인의 마을 체류는 엄격하게 통제된다. 주민들과 식사는 가능했으나 취침은 허락되지 않았다.

원생자치회 총무인 40세의 최씨는 환자 경력을 갖고 있지만 자치회 산하 편의점을 경영하는 부인은 환자가 아니고, 둘 사이에 자녀도 있다. 86세인 김씨 부인은 90세의 김씨와 이곳에서 혼인해 50여년을 건강하게 해로하고 있다. 어린 삼남매와 생이별한 부인은 이곳에서 새 살림을 차렸다. 엎어둔 바가지 속에 번호를 적어 놓고 여성들이 남성을 고르는 혼인 방식이었다. 글공부를 많이 했던 김씨는 이곳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단종을 당한 김씨였기에 자녀는 없다. 뒷산으로 다니면서 캐 온 약초로 환약을 만들어서 남편을 모시는 부인의 모습은 부부금실을 넘어 공양의 수준이다. 옆집에 거주하는 한씨는 소설을 쓴다. 김씨 부인이 이웃과 나누는 조촐한 다과와 나물이 정겹기 한없었다.

삼남매와의 이별에 대해서 물었다. 녹동나루에서 배를 타는 순간 김씨 부인은 모든 것을 잊었고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천형'이란 경험이 과거의 포기가 아니라 미래의 설계를 재촉했던 모양이다. 하늘 차원의 포기가 인간 차원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한센인의 장수율이 높은 이유가 하늘 차원의 포기일까, 나병 치료제 DDS의 영향일까.

나병의 초기 증상은 두 가지다. '마목들었다'는 것이며, 팔꿈치의 피부가 무감각인 상태를 말한다. 주민들의 은어인 '마목'은 무감각의 의미다. '마목'이 든 팔꿈치는 검은 반점이 퍼져 있다. 손등에서 엄지와 검지 사이의 통통한 근육 부분의 은어는 '하꾸'(일본어의 변형으로 생각됨)다. '하꾸'가 약화되는 증상을 보인다. 토속적인 나병 진단법은 팔꿈치에 '마목'이 들었거나 손에 '하꾸'가 없어지는 경우다. 토속 분류에 의하면 '물병' '깡병' '혼합'의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물병의 특징은 눈썹이 빠지지만 깡병은 코와 손가락 등 말단이 문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깡병의 경우는 출산이 가능하지만, 물병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현재는 치료약인 DDS를 공급하기 때문에 중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단히 드물다.

그 전에는 '기름약'이란 대풍자유(大風子油)가 있었다. 그것을 먹으면 속이 뒤집어지고, 주사제로 사용할 경우에는 상당히 뜨거웠다. 기름약을 잔디밭에 뿌리면 잔디가 죽을 정도로 독한 약제였다. "헌 두데기 보수하는 데 천이 더 많이 든다." 이곳 환자들은 복합적인 통증과 외상 환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전문의사들이 필요한데 "여기는 전문의사가 없고, 모두 학생의사들뿐"이라는 불만이 있었다. 환자들은 정부가 파견한 공중보건의를 '학생의사'라고 부른다. 문제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병원에서는 외부 종합병원들과 협력 관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의료진 수급체계상의 문제인데, 의정갈등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 소록도에서는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까.

그러나 간호현장에 대한 환자들의 만족도는 최상급이다. 간호조무사들이 치료실과 가정을 방문해 환부 치료를 하며, 노령 환자들의 대소변 보기를 도와주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손가락이 절단된 노인들에게 밥을 먹이기도 하고, 손톱깎이를 들고 다니면서 노인들의 손톱과 발톱을 정리해준다. 주민들은 "자식 다 필요 없다. 우리 간호가 최고여! 간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 간호들 정말로 고생하시오"라고 감읍한다.

소록도의 별명은 '찌라도'다. 성서에 나오는 문장 말미의 표현에 '할찌라'라는 술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주민들은 성경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살아간다. 새벽기도는 소록도 살림살이의 대표적 특징이다. 직원마을에도 교회는 있지만, 그곳에서는 새벽기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의 교회는 잠자고 있었는데, 환자마을의 교회는 깨어 있다는 얘기다.

노령 환자들에게는 신앙으로 맺어진 자녀가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이승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영적 인연으로 맺은 자식들이 인생의 반려로서 역할한다. 전도사(76)에 의하면 "소록도의 환자마을은 새벽 3시면 깬다. 한센병은 고치는 병이 아니고, 심신을 깨끗하게 하는 병이다. 찬송과 기도가 스트레스를 토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삶의 고통은 기도와 찬송으로 토해낸다. 소록도 삶의 특성은 "기쁘게, 감사히 살고, 마음의 즐거움이 양약"이란다. 억압과 차별의 외부 낙인을 웃음으로 정화하는 지혜가 포착되었다. 공부할 기회를 주신 소록도 주민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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