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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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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이후가 빛난 대통령…지미 카터 전 대통령 100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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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향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24년 10월 1일생인 카터 전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고향인 조지아주에서 호스피스의 간호를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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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8년 4월 13일 예루살렘에서 납치된 이스라엘 군인 길라드 샬릿의 부모인 아비바와 노암 샬릿(보이지 않음)을 만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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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엔 경제·안보적 어려움에 직면하며 재선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퇴임 이후 평화 해결사로 활약하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재임 때 '스태그플레이션' 비판…첫 단임 대통령



1977~1981년 재임한 카터 전 대통령은 물가 상승 등으로 현직 시절에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집권기는 베트남 전쟁 직후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당시는 경제 침체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곤경의 시기였다”며 “저상장과 고인플레이션을 의미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은 비판가들이 카터의 경제 정책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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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방한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정책과 한국인권 비판을 둘러싸고 두 사람은 노골적인 갈등을 빚었다. 박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카터의 정책을 통렬히 비판했고, 카터는 결국 주한미군 철수를 백지화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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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으로도 미국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국제관계에서 ‘공정함’을 내세우며 파나마운하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겨줬는데, 이에 대해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과 공화당은 “국익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결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로도 2차 오일 쇼크, 이란의 미 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악재가 이어지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그는 결국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인물이 됐다.



'주한미군 철수' 놓고 박정희 대통령과 '설전'



카터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엔 4~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당시 3만명 수준이던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미국 내에서 반대론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백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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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문제로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94년 6월 중순 미국의 핵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서해 갑문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일성 주석.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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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밀 해제된 외교 문서에는 1979년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방위비 분담금 확대 등을 요구했고, 박 전 대통령은 “미군이 언젠가는 철수해야 하지만, 북한은 현재 우리보다 우월하고 그들의 대남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며 카터 전 대통령을 설득했다. 주한미군 관련 문제는 박 전 대통령이 방위비 증액 의사를 밝히면서 가까스로 봉합됐다.



퇴임 이후 오히려 더 높은 평가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봉사 활동과 국제적 평화 문제 등에 헌신하며 퇴임 이후에 오히려 미국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퇴임 이듬해 세운 카터 센터를 바탕으로 평화·민주주의 증진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서며 재임 기간 때보다 퇴임 후 더 빛나는 전직의 시대를 구가했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돕는 봉사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반도 문제' 깊숙이 관여…노벨평화사 수상



한반도 평화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1차 북핵 위기’ 때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 주석과 담판한 끝에 북·미 협상의 물꼬를 텄다. 2010년 8월과 2011년 4월 미국인 억류 사건과 관련 ‘디 엘더스’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재차 북한을 방문하는 등 총 3차례 방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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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에티오피아·수단·아이티·세르비아·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재자로 나섰다. 이런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바이든 "탁월한 지도자 잃어"…트럼프 "모두 감사의 빚"



카터 전 대통령의 별세에 대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미국과 전 세계는 탁월한 지도자이자 정치가, 인도주의자를 잃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어 “카터 전 대통령의 특별한 점은 그를 만난 적이 없는 미국과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도 그를 소중한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이라며 “그는 연민과 도덕적 명료함으로 질병 퇴치, 평화 구축, 인권 증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노숙자 수용 등 약자를 옹호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의 중추적 시기에 도전에 직면했고, 그는 모든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며 “이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고 적었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봉사할 기회를 얻었던 사람들은 이 자리가 매우 특별한 모임(club)이라는 점을 알고 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를 이끄는 막중한 책임감은 (대통령을 역임했던) 우리만이 공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5년 8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고, 2019년엔 낙상으로 뇌 수술을 받기도 했다. 배우자인 로잘린 여사는 지난해 11월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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