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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일)

‘또르르르’ 굴러간 동전, 베토벤을 살아 있게 만들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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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대 때 이미 유럽에서 큰 명성을 쌓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이미지는 미국의 팝아트 화가 앤디 워홀의 ‘베토벤’(1987).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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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싸구려 하숙집서 쓴 피아노곡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 부제
‘잃고 싶지 않은’ 인간 본성 일깨워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기억이 있으신가요? 살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물건을 잃어버리곤 하지요. 그중엔 아마 두고두고 생각나는 물건이 있을 거예요. 추억이 담겼거나, 가치가 큰 물건이라면, 쉽게 잊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저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 편이라, 가끔 뭔가를 잃어버리면 그 충격이 좀 오래가는 것 같아요. 거의 매일 어딘가 새로운 무대에서 강연이나 공연을 하니, 유독 길에서 자주 잃어버리곤 합니다.



제가 가장 빈번하게 잃어버리는 건 귀걸이예요. 피아노를 격렬하게 치는 중에, 또는 외투를 입고 벗다가도 툭 떨어지곤 하니, 결국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에는 아침 기온이 상당히 낮았던 어느 날 강연을 마치고 오는 길에, 코트를 벗어서 열차 머리 위 짐칸에 올려두고는 깜박 잊고 그냥 내려버렸어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코트의 존재를 잊고 살았답니다. 뒤늦게 역에 연락해 알아보니, 이미 코트를 찾아오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내가 잃어버린 건 다시 사면 되는 물건들이니까. 필통도 다시 사고, 외투도 다른 거 입으면 되니까.” 그런 제게 친구가 거들어요. “잃어버린 게 현금은 아니잖아.”



현금을 잃어버리면, 그 순간 놀라고 당황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 돈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엔 정말 화가 날 것 같아요. 물론 잃어버린 자신에게 화를 내야겠죠. 놀랍게도 있어서는 안 되는 그 상황을 음악으로 만든 사람이 있어요.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의 피아노곡 ‘론도 카프리치오 Op.129’예요. 오푸스(Op.) 번호로 보면 교향곡 9번 ‘합창’ Op.125보다도 늦게 출판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작곡은 말년이 아닌, 1795년, 베토벤이 빈으로 이주해 살던 20대 중반 무렵에 작곡했어요. 이 곡의 부제를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텐데요,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Rage Over a Lost Penny)입니다. 제목 그대로, 베토벤이 동전을 잃어버리고 화가 나서 쓴 피아노곡입니다.



어느 날 마룻바닥의 틈 사이로 또르르 굴러 들어간 동전 하나를 마루를 뜯어내지 않는 한 찾을 길이 없었던 베토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베토벤은 주변 사람들에게 곧잘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치곤 했어요. 그의 불같은 성격은 이 곡의 제목으로 더욱 흥미를 돋우기도 하지요. 베토벤은 빈에 살았던 약 35년 동안 평균 6개월에 한번, 총 68번 이사를 다닙니다. 그의 불같은 성격과 피아노 소리 때문에도 한 집에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었는데요, 리히노프스키 공작 등 귀족의 배려로 좋은 집에서 지낸 적도 있지만, 이 무렵 베토벤은 싸구려 하숙집에 살고 있었으니, 마룻바닥을 뜯어낼 수 없었던 상황이 더욱 이해되지요.



특히 이 곡을 연주하다 보면, 베토벤의 심정에 무척 공감하게 되는데요, 알레그로 비바체로 생동감 있는 빠른 템포에서 주제 선율은 마치 동전이 통통 바닥에 떨어지더니 도망가듯 떼굴떼굴 굴러가는 듯해요. 그러더니 마룻바닥의 벌어진 틈 사이로 퐁당 빠지고 마루 밑에서 다시 떼구르르 구르는 듯한 모습이 오른손의 짧은 스타카토와 16분음표들로 표현됩니다. 저는 이 곡을 연주할 때 왼손의 8분음표 화음을 박진감 넘치게 연주하며 마치 동전이 베토벤을 놀려대는 기분을 표현하곤 해요. 이 재미난 주제는 마치 변주곡처럼, 조성이나 형태를 바꿔서 계속 등장합니다. 동전이 굴러가는 16분음표들은 왼손에서도 등장하는데 앞에 짧은 꾸밈음을 붙여 동전들이 베토벤을 더욱 약 올리는 듯 느껴져요. 즉흥 연주의 귀재였던 베토벤은 왼손의 분산화음을 넓게 쓰기도 하고, 또 양손이 번갈아 16분음표를 연주하며 화가 잔뜩 난 베토벤을 동전들이 놀리는 듯 표현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빠른 16분음표들이 사라지고 돌체(dolce)로 부드러운 노래 선율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연주할 땐, 복잡한 감정이 들어요. 내가 지금 화가 난 베토벤을 위로하는 건지, 아니면 오히려 화가 나 베토벤의 화를 더 돋우는 건지 모르겠어요. 강약의 대비와 비트가 느껴지는 쉼표의 적절한 사용으로 유쾌한 기분을 선사하는 곡이지만, 실은 연주자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답니다. 16분음표들이 가득한데다 웬만한 동전보다도 더 빠르게 굴러가야 하다 보니, 저도 마치 연습곡(Etüde)을 연습하듯, 이 짧은 음표들이 동전보다 더 ‘이븐’하게(even, 고르게) 들리도록 연습해야 하는 까다로운 곡이에요.



만약 베토벤이 종이돈을 잃어버렸다면, 이렇듯 생동감이 넘치는 다양한 음악적 표현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베토벤이 잃어버린 동전의 가치가 얼마든, 베토벤도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이 제목 한줄이 일깨워줍니다. 그가 친근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베토벤이니까 이런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죠.



인생을 살다 보면 얻는 것도 많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기도 합니다. 살면서 꼭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 세가지를 떠올려봤어요. 가족, 사랑, 웃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인데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친구, 추억, 건강 그리고 우리의 감각과 느낌, 감탄 등. 이것들은 삶의 가치를 올려주고,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가 되지 않는,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베토벤이 약 70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이 곡의 악보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대단하고 또 가장 감사하게 되네요. 그는 누구보다도 꼼꼼한 사람이었거든요. 새해를 맞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결국 청력을 잃게 된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요.



한겨레

안인모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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