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라증류소의 증류기. 박병진 칼럼니스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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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진 칼럼니스트 |
《머나먼 땅끝의 작은 섬, 피트 위스키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아일라섬을 가려면 세계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 최소한 비행기를 세 번은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먼 곳의 위스키 증류소가 하나 있다. 바로 아일라섬에서 페리를 타야만 연결되는 또 하나의 섬이다. 유일한 접근 방법은 아일라섬의 포트 아스카익항에서 페리를 타고 약 0.5마일(804.6m) 건너편의 페올린 선착장으로 가는 바닷길뿐이라 정말 땅끝 너머의 땅끝이다.》
주라는 게일어로 사슴이란 뜻으로 이 섬에는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지만 사슴은 수천 마리가 살고 있는 사슴의 섬이다.
황량함의 끝, 땅끝 그 너머인 이곳의 특별한 매력을 찾아 나는 약 10년 전 늦가을 아일라섬에 도착했다. 아일라섬의 숙소에 짐을 풀고서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포트 아스카익항으로 향했다. 주라섬 내의 교통편이 없어서 아일라에서 대절한 택시를 페리에 싣고 5분간의 짧은 항해 후 이동해야 하는 묘한 여정이었다.
페리에서 바라본 팹스 오브 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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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섬은 우리나라의 거제도만 한 섬이다. 페올린 선착장에 도착해서부터 증류소까지 달려온 이곳의 풍광은 아름답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는 없는 곳이다. 마치 화성이라도 온 듯 이어진 민둥산과 그 아래의 낮은 관목들, 그리고 그저 넓게 펼쳐진 초원이 묘하게 불협화음을 이룬다. 특히 바다를 건너기 전 아일라섬에서 바라보는 세쌍둥이 봉우리인 팹스 오브 주라의 기괴하고 황량한 모습을 보면 낮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왜 이 섬에 주민이 100여 명뿐인지 쉽게 이해된다. 아무것도 없는 민둥산, 흔한 나무 한 그루도 없는 황량함 그 자체인 이 미지의 장소에 나도 조금씩 몰입돼 갔다.
주라증류소로 가는 자동차에서 찍은 주라섬의 풍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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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주라증류소, 무심한 분위기가 지금은 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솔직히 그런 기대는 없다. 10년 전 주라증류소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무런 동요 없는 그 공간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낯선 방문객의 침입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다. 그저 조용히 눈인사로 나를 맞고, 한참 지나서야 나중에 사람이 몇 명 더 오면 증류소 투어를 할 것이니 그저 기다리라고 한다. 그렇게 주라 위스키의 첫 만남은 조용하지만 왠지 뭔가 있을 것이란 작은 기대와 함께 시작됐다.
아일라 섬에서 커다란 페리를 타고 약 5분간 이동해야 주라섬에 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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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중에서 예전보다 쉽게 주라 위스키가 눈에 띈다. 이런 오지에서 전 세계에 알려진 유명한 상품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주라는 이웃한 아일라섬의 강렬한 피트 위스키보다 더 균형감 있는 피트 향으로 호평을 받고 있어 점점 더 인기를 얻어가는 중이다. 또한 계속해서 새로운 시리즈를 고민하고 만들어 내는 기획력과 함께 가장 큰 장점인 합리적인 가격까지 갖추고 있어 빠른 시간에 메이저 위스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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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자체만 보면 거친 자연환경과 드라마틱한 풍광이 있어 강렬한 피트와 숙성 환경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웃한 아일라에 비해서는 훨씬 덜 스모키하고 달콤한 과일 향을 동시에 보여줘 주라는 외딴섬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또 하나의 전설이 됐다. 섬에는 대부분 주라 위스키 혹은 그 연관된 산업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살고 있다. 지나치게 느긋하고 태평한, 마치 구도자 같은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보인다. 그게 주라증류소의 직원이든, 우연히 만난 우체국 직원이든, 양 떼를 건사하는 양치기든 내게는 모두 구도자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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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엔 주라 위스키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이곳은 바로 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드러내며 미래 사회의 부정적이고 음울한 극단을 묘사한 ‘1984’를 집필한 곳이다. 조지 오웰은 주라섬의 음울한 풍광과 1984가 상징하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일체화하면서 주라섬 북쪽 끝의 어두운 오두막 한편에서 글을 써왔다.
하지만 인류는 그가 생각한 미래와는 다른 미래를 맞이했다. 1984년 1월 1일 백남준 작가는 파리와 런던을 연결하는 실시간 이벤트,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통렬히 부정했다. 1984년은 매킨토시가 출시된 해로 젊은 리들리 스콧이 만든 IBM으로 상징되는 빅브라더를 때려부시는 유명한 슈퍼볼 광고가 있었다.
이제 주라 위스키는 1984로 상징되는 주라의 어둠을 극복하고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위스키로 거듭나 포근한 자유와 평온함을 상징하게 됐다. 곧 있으면 다사다난했던 2024년을 지나서 새해이다. 2025년을 맞이하는 순간에 들어야 할 축배라면 자유와 평온함을 뜻하는 주라 이외에 무엇이 또 있을까.
글·사진 박병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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