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전봉준투쟁단’은 “쌀값은 올리고 윤석열은 내리자”며 한참 전부터 윤석열 퇴진 운동을 줄기차게 펼쳐 왔다. 나도 대통령 부부의 해괴망측한 행보에 기함하면서도 바닥 지지율로 임기는 대충 마치겠거니 했다. 하나 농민들이 움직이면 권력은 뿌리째 뽑힌다는 선험이 농민운동에는 있다. 8년 전 백남기 농민이 쌀값 보장을 외치다 물대포에 쓰러지자 전봉준투쟁단은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박근혜 탄핵의 포문을 열었으나 농민들이 죽지 않고 신나게 농사짓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외침은 끝내 멈춰 있다. 여전히 많은 농민들이 빚에 치여 죽고, 농기계에 치여 다치고 죽는다. 하여 남태령은 전봉준이 끝내 넘지 못한 우금치이자 미완의 대첩이다.
동지섣달 남태령의 밤은 노래와 춤으로 가득했다. 시민들은 네댓 시간씩 기다려 마이크를 쥐고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외쳤다. 쌀밥을 먹으면서도 양곡관리법이 뭔지, 농민들이 왜 트랙터를 끌고 와야만 했는지 이제 알았다며 미안하다 하였다. 정부도 국회도 적당히 포로교환용으로 쓰려던 양곡관리법을 제대로 공부하겠다 다짐했다. 이어서 자신의 응원봉이 누구를 향한 덕질인지 고백하며 사랑한다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도 고백했다. 이주노동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호남혐오를 마주하는 호남 출신의 분노에 대해 토로했다. 성소수자 남성의 삶을, 여성 농민으로 농업정책과 농촌에서 받았던 차별과 배제를 고발했다. 남태령에선 ‘의장님 한 말씀’으로 시작되는 관성화된 집회가 아닌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농민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시민이 ‘농민가’를 배우며 서로를 경청했다. 이날 남태령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트랙터와 응원봉이 만나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야 할지 토론하는 만민공동회의 장이었다.
비싼 스포츠카는 볼 수 있어도 트랙터 볼 일은 없는 도시에서 트랙터의 도열은 자체로 장관이다. 농민은 신기해하는 시민들이 트랙터에 타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트랙터는 기름도 많이 먹고 바퀴도 비싸다. 흙바닥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트랙터가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바퀴가 닳아버린다. 트랙터는 농가의 주요 자산이어서 빚을 갚지 못하면 빨간딱지가 가장 먼저 붙는다. 농사지어 트랙터값 할부 갚고 나면 통장은 마이너스다. 그래서 트랙터는 농민에게 애증의 존재다. 반면 트랙터를 부릴 수 없는 농민들도 많다. 농사 규모가 작은 청년농민과 고령의 여성농민들이 그렇다. 평생 할머니 농민은 트랙터 없이 호미 한 자루로 풀도 뽑고 무릎과 허리도 뽑으며 농사를 지어왔다.
트랙터로 땅을 갈고 나면 씨앗을 심고 풀을 매는 호미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 트랙터의 시간이 지났다. 트랙터 너머 호미와 응원봉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그날 남태령은 동지섣달 꽃 본 듯, 잠시 신기했던 한겨울 밤의 꿈일 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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