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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기고]공직자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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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돈 하며 살아가는 요즘 세상에서 가치가 떨어졌다는 이도 있고, 실체 없는 허영된 열망에 불과한 구태스러운 것에 아직도 매달리냐는 핀잔도 있겠지만, 사실 ‘명예’가 중요한 직업이 있다. 박봉에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학자, 주어진 공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근무하는 공무원, 민간인보다 폭넓게 기본권 제한을 받지만 사명감 하나로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 특히 그렇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내가 왜 정상적인 재판 절차에 의존하지 않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그 시간 나는 독일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었고, 따라서 독일 민족의 최고재판관이었다고 말입니다. 나는 반역의 주모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 누구든지 국가를 치려고 손을 든다면 필연적인 죽음이 그에게 닥칠 것입니다.” 히틀러의 1934년 7월13일자 연설이다. 그로부터 보름 전이었던 1934년 6월30일 밤,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와 비밀경찰(Gestapo)을 동원해 돌격대(Sturmabteilung) 지휘부와 정치적 반대 세력을 영장 없이 체포한 다음,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처단했다. 당시 바이마르공화국 수상으로서 내각 수반의 지위에 있던 히틀러는, 수권법(授權法)을 통해 이미 입법권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형식적 법치주의의 틀조차 갖추지 않은 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숙청했다는 점에서, 1934년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은 노골적인 ‘친위 쿠데타’의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히틀러의 위 연설 직후 저명한 헌법학자였던 카를 슈미트는 ‘총통은 법을 수호한다’(Der Fuhrer schutzt das Recht)라는 글을 통해, 장검의 밤을 “가장 고결한 형태의 행정적 정의”라며 정당화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나치독일의 패망으로 귀결되자, 이 글은 카를 슈미트에게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된다.

12·3 비상계엄의 밤, 실시간 방송으로 국회 상황을 지켜보며 초헌법적인 계엄 선포에 대한 해제 요구 의결을 초조히 기다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국회의원 출입을 막기 위해 국회 봉쇄를 지시한 고위 경찰 공무원, 계엄 해제 요구 의결을 저지하기 위해 의사당에 병력 투입을 지시한 고위 군 지휘관은, 비단 본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국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지울 수 없는 멍에를 남겼다.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선포에 결사반대하지 않은 국무위원도 해당 공직의 존재 이유를 망각했다는 몰염치는 물론, 자신을 신임해 그 직에 임명한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는 불명예를 역사에 기록하게 되었다.

고위 경찰·군인과 장관급 국무위원들에게, 과거 엄혹했던 시절의 독립운동가들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고위직에 부여된 명예와 책임에 걸맞게, 위헌적 지시에 대해서는 그 직을 걸고 “안 된다, 못한다”며 반대하고 거부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그날 봉쇄 지시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출입을 묵인했던 현장 경찰관, 저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회 의결에 물리력 행사를 자제했던 출동 장병들의 용기에 감사드린다.

경향신문

승이도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승이도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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