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옥씨부인전’ 1화. 여주인공 옥태영(구덕)이 성난 군중들의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꼿꼿한 자태로 심문장에 선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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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사태로 두번이나 결방해도 ‘옥씨부인전’(JTBC)의 시청률과 화제성은 꺾일 줄 모른다. 주체적 여성을 내세운 창의적인 극본과 휘몰아치는 전개가 시청자를 빨아들인다. 아름다운 영상과 주연 배우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여주인공 임지연은 강렬한 감정을 오가는 역할임에도 과함 없이 완급을 조절하며, 소박함과 기품이 공존하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남주인공 추영우도 1인 2역(송서인·성윤겸)을 맡아, 두 인물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달리 표현한다.
드라마는 첫 장면부터 강렬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남편이 둘이요, 신분이 둘인 여자’에게 돌팔매가 쏟아진다. “너는 노비냐, 아씨냐”는 추상 같은 질문에 굴하지 않고, 한 여성이 꼿꼿한 자태와 의연한 목소리로 법조문을 읊으며 좌중을 압도한다. 노비로 태어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다 아씨 신분을 얻은 파란만장한 천민의 일대기이자, 천재 여성으로 차별을 딛고 외지부(변호사)가 된 전문 직업인의 성장기이며, 빈민·여성·성소수자의 연대로 이룬 해방기이다. 계급, 젠더, 퀴어의 문제를 사극의 틀 안에 녹여낸 드문 시도로, 오늘날 민주광장에 가장 어울리는 드라마다.
드라마 ‘옥씨부인전’ 1화. 도망 노비인 여주인공 구덕(오른쪽)이 옥태영 아씨를 만나, 동무가 되고 그의 이상을 듣는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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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서 아씨로, 계급을 뛰어넘다
‘옥씨부인전’의 초반 갈등은 계급 모순이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 사회로, 인구의 상당수인 노비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모든 재능이 뛰어난 구덕이지만, 주인에게 학대당한다. 병든 어머니는 치료도 못 받고 개돼지처럼 버려졌다. 구덕은 아버지와 도망치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일당을 벌기 위해 주인 아기씨와 혼담이 오가는 송서인의 집에 숨어들었다가 들켜서 죽도록 매를 맞는다. 주인마님의 성 착취 상대가 될 순간에, 구덕은 낫을 휘두른다. 구덕이 성 착취를 당하거나, 남성에 의해 구조되지 않고, 스스로 낫을 들어 망설임 없이 주인을 베는 장면은 굉장한 해방감을 준다.
드라마는 노비의 입장에서 조선사회의 모순을 그리는데, 이는 매우 획기적이다. 지금껏 많은 사극이 궁중 암투를 그리거나, 사대부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노비의 관점에서 그린 영화 ‘전란’이 그러하듯, ‘옥씨부인전’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특히 여성 노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은 더욱 소수자성이 강하다.
도망 노비 구덕은 천신만고 끝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양반 아씨 옥태영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단 며칠의 만남이지만, 구덕은 옥태영이 화적떼의 습격으로 숨진 뒤 그의 삶과 꿈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구덕이 처음 옥태영을 보았을 때, 그저 “노비를 동정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진 만큼 책임을 느끼고” 동무가 되려는 옥태영을 보고, 다른 가치관을 알게 된다. 억압, 차별, 착취가 아닌 자유, 평등, 연대를.
드라마 ‘옥씨부인전’ 1화. 노비로 학대당하던 여주인공이 주인에게 성 착취를 당하기 직전 낫으로 베어 버리는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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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대 힘입어 전문직업인으로
구덕은 옥태영에게 외지부라는 직업과 여성도 할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 구덕이 처음 옥태영 행세를 한 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곧 옥태영의 할머니에게 털어놓고, 가짜 신분은 비밀로 승인된다. 구덕에게 옥태영의 신분은 도망 노비임을 감추는 도피처가 된다. ‘옥씨부인전’이 개인의 신분 상승에 초점을 맞춘 과거 사극에 머물렀다면, 구덕이 옥태영이 된 것을 성공으로 보고, 노비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천승휘(송서인)와 재회하는 것을 해피엔딩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취적인 이 사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외지부 옥태영의 공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구덕은 노비 백이의 한을 풀어주고자 쓰개치마를 벗고 나온다. 백이를 연모해 쫓아다니던 양반 도령으로 인해, 백이가 억울하게 죽었다. 자살로 위장되고, ‘양반을 유혹하려 했다’는 2차 가해를 당한다. 딸의 죽음에 항의한 노비 막심도 곤장에 맞아 죽을 처지에 몰린다. 여기서 옥태영은 어찌할 것인가. 그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만, 법정에서 밝히지 않는다. (외지부는 검사가 아니다.) 그보다 ‘내 사람을 보호하는 데’ 힘쓴다. 일단 막심이 곤장을 맞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범죄에 가담한 노비를 증언시키기보다 도피시키기를 택한다. 노비가 죽임당하기 전에 보호하려는 것이다. 결국 무고한 도령이 부모의 죄를 대신해 살인죄를 거짓 자백한다. 옥태영은 모른 척한다. 부모를 고발할 수 없고, 순애보를 간직하며 대신 속죄하고픈 도령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옥태영은 외지부로서 전문성과 직업윤리를 점점 쌓아간다. 그는 약자를 돕는 것에서 나아가 ‘원수라도 법의 보호를 받게 하는 것’이 외지부의 일이라며, 전문성을 체현한다. 또한 법을 무기 삼아 사적 보복을 하지 않는 직업윤리를 보여준다. 옥태영은 시댁을 몰락시킨 원수의 불법 금광을 알아낸다. 목숨을 걸고, 금광을 수색해 감금되어 있는 아이들을 구출한다. 범인이 자수하자, 옥태영은 변론을 자청한다. 옥태영은 몰래 금광을 채굴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런 다음 불법 금광은 찾기 어려우니 자수를 유도해 국고를 튼튼히 해야 한다며, 국가 재정의 논리로 재판관을 설득해 사면받는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전문직업인의 면모이다.
‘외지부 옥태영’은 구덕의 노력과 수많은 여성 연대로 얻어진 산물이다. 도망 노비 구덕이 주막에서 이모에게 의탁하고, 옥태영을 만나 사상과 꿈의 세례를 받고, 그의 할머니를 만나 신분을 승인받고, 백이와 막심을 통해 외지부로 첫발을 떼었다. 이후 성소수자 남편과 전문 관료인 시부를 만나 외지부로서 경험을 더욱 쌓은 옥태영은 마침내 성소수자를 위해 변론한다. 계급, 젠더, 퀴어로 문제의식이 심화 확장된다.
드라마 ‘옥씨부인전’ 4화. 외지부(변호사)가 된 여주인공이 괴물이라는 이유로 참형 위기에 몰린 성소수자를 변론하는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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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야기가 느닷없다?
‘옥씨부인전’ 4화에서 갑자기 성윤겸이 성소수자이자, 성소수자를 이끄는 단주임이 밝혀지며, 역모로 쫓긴다. 이런 퀴어 서사가 느닷없다며 불평한다. 매거진 ‘아이즈’(IZE)는 “퓨전이라는 이름의 다양성인지, 극적 갈등을 위한 무리한 설정인지 섣불리 판단하기 이르다”며 유보적인 평을 내놓았다. 2022년 사극 ‘슈룹’(tvN)에서 성소수자 대군이 등장한 것에 비해서도, 사극의 남자 주인공이 퀴어로 등장하는 것은 파격적이다. 하지만 ‘옥씨부인전’의 퀴어 등장이 느닷없거나, 동성애 코드를 미끼로만 써먹는 ‘퀴어베이팅’이라고 비난하는 건 억지스럽다.
‘옥씨부인전’은 조선시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가상 사극이다. 이항복이 저술한 ‘유연전’에 등장하는 실제 송사 사건인 유유와 백씨부인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땄다. 실제 사건은 남편 유유의 가출과 가짜 남편의 등장에서 비롯된 살인 무고가 얽힌 복잡한 송사다.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지진 않았지만, 야사에서는 유유의 가출이 혹시 성소수자와 관련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가짜 남편이 등장하려면 프랑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사건처럼 어느 정도 모습이 닮는 것이 필요했을 터. ‘옥씨부인전’은 ‘유연전’의 가짜 남편 이야기에서 ‘성소수자’ 추측과 ‘닮은꼴’ 설정을 가져왔다. 드라마 첫 장면의 “남편이 둘인 여자”라는 말에 두가지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조선 시대라고 퀴어가 없었겠는가. 세종 때 세자빈 봉씨와 병조판서 이선 등의 동성애 기록이 있다. 세조 때 ‘논바이너리’였던 사방지에게 “병자인 것을 참작하여 따로 국문하지 않고 외방 고을 관노비로 영구히 소속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옥태영이 변론 중 인용한 선례가 사방지에 대한 기록이다. 드라마는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다소 거칠게 그린다. 성윤겸이 “나는 여인을 품을 수 없다”고 커밍아웃하자, 구덕이 긴가민가 알아듣는다. 그 후 구덕은 “소수자”라고 칭한다. ‘(성)소수자’는 최근 사용하는 용어로, 조선 시대에 동성애를 뜻하는 말은 대식, 남총, 남통, 남색 등이 있다. ‘(성)소수자’는 직관적인 이해를 돕지만, 사극의 몰입감을 해친다. 그 결과 ‘논바이너리’를 둘러싼 폭력적 장면들도 고증이 생략된, 현대인을 향한 퓨전 사극일 거란 느낌을 준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혐오와 차별에 시달리는 성소수자들을 위해 발언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분과 처지와 상관없이 법 앞에서 평등하게 심판을 받아야 할진대!”라는 옥태영의 변론은 여전히 제정되지 못한 차별금지법을 정확히 환기한다.
“꿈이 뭐냐”는 송서인의 질문에 노비 구덕은 “맞아 죽지 않고, 굶어 죽지 않고, 늙어 죽는 것”이라 답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21세기 발달장애인 자매를 돌보는 장혜영의 노랫말이다. 놀랍도록 비슷하지 않은가. 2024년 열린 광장에는 계급, 인종, 젠더, 퀴어, 장애의 깃발이 함께 나부낀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어떤 의제도 나중으로 미루어지지 않는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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