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7 (금)

1997년 그리고 2024년 겨울…‘소시민 위한 정치’를 기다리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1997년 12월27일치 한겨레 ‘고단한 세상살이 내일을 위하여…포장마차 인생들의 97년 겨울이야기’ 기사 속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박지영 | 산업팀 기자



“재룟값이 너무 올라 장사 못 해 먹겠다. 3000원도 안 하던 커피 1봉지가 1만원으로 뛰었다.”



“이제는 돈 있는 사람이 돈 버는 세상이에요. 금리가 얼마인데요.”



“요즘은 일하고 있어도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며칠 전에 임원 30%가 잘려나갔는데, 다음은 내 차례려니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제오늘 기사인가’ 싶지만 아니다. 1997년 12월27일치 한겨레 지면에 실린 ‘고단한 세상살이 내일을 위하여…포장마차 인생들의 97년 겨울이야기’ 기사의 일부다. 이 기사는 1997년 12월22일 외환위기 직후 서울 영등포구 한 포장마차의 밤 장사 풍경을 담았다.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몰라 초조함과 불안감이 밴 표정으로 포장마차를 찾은 30대 증권회사 직원들, 건축 현장에서 익힌 기술 덕에 ‘명퇴 걱정은 없다’는 20대 청년, 한때 여행사 이사였지만 부도가 나자 1순위로 명퇴당했다는 40대 중년 손님까지. 국가 부도 위기 직후 저마다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포장마차를 찾아 술잔을 기울이는 소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27년 전 한겨울 포장마차 풍경 위로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이 같은 듯 다른 듯 절묘하게 겹친다. 고물가와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갈수록 힘들어지는 자영업자들,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인력 감축에 나선 기업들, 퇴직 이후 소득 절벽을 마주한 중장년층, 일할 의지마저 포기해버린 청년들. 27년 시차를 둔 경제 기사들 속 ‘주인공’은 다르지만, 열악한 현실을 토해내는 이들의 ‘목소리’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듯하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급격한 등락을 거듭하며 ‘선진국’ 지위에 올랐지만, 정작 평범한 소시민들은 줄곧 칼바람을 피부로 느끼며, 차가운 겨울 한복판을 뚜벅뚜벅 걷고 있던 것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한국 경제에 느닷없이 투하된 ‘12·3 내란사태’ 핵폭탄은 그래서 더더욱, 역사에 두고두고 기록되고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지난 24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동향 조사 결과를 보면,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8.4로 전달보다 12.3포인트 떨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이 덮친 2020년 3월 이후 최대 폭 하락이다. 원-달러 환율 역시 1400대를 돌파한 뒤, 1500원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일각에선 외환위기 우려까지 거론된다. 내란사태의 사법·정치적 책임은 절차에 따라 물을 수 있지만, 소상공인·기업 등이 입은 경제적 피해에 관한 책임은 마땅히 물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대통령의 죄질은 더욱 무겁다.



“그렇지만 이날 밤 포장마차를 찾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좌절과 분노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한가닥 희망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 한편엔 저마다 찍은 후보는 달랐지만 모두 새 대통령 당선자에 거는 기대가 있었다.”



1997년 12월27일치 기사는 포장마차 손님들이 말하는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로 끝을 맺는다. 고단한 시대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던 1997년 겨울의 그들처럼 2024년 겨울의 시민들은 거리에서 탄핵봉을 들고 ‘더 나은 삶’을 외쳤다. 2025년에는 유독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을 위한 정치를 볼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jyp@hani.co.kr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