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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2주의 기록 [전쟁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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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평론가]

1962년 10월 27일.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미국과 소련의 대치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했다. 다음날,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가 한발 물러서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쿠바 봉쇄'를 풀면서 위기가 진화됐다. 언뜻 보면, 두 나라 지도자의 결단이 위기를 종식시킨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밑단엔 재앙을 막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행운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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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일의 한 장면.[사진 | 더스쿠프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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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은 냉전 역사를 통틀어 미국과 소련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해였다. 분단 독일을 둘러싼 긴장은 베를린 장벽 설치로 이어졌다. 미국이 터키(현 튀르키예)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소련이 1956년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미·소 갈등이 점차 고조됐다. 1960년 미국의 고공정찰기 U2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소련은 적극적인 압박전략을 모색했다.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점한 핵미사일 전력 차이를 만회할 방편을 찾던 소련은 미국 바로 앞의 섬나라 쿠바를 주목한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혁명가 체 게바라와 손잡고 친미親美 정권을 전복시키고 쿠바 공산화에 성공했다. 소련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1962년 여름부터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소련 화물선들이 연일 쿠바로 향하는 것을 포착했다. 화물선에 곡물이 실려있다고 추정한 미군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바 상공에서 정찰기가 찍은 사진에 핵미사일 탄두와 발사대가 선명하게 드러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미국 정부는 빠르게 대응했다.

1962년 10월 22일, 케네디는 TV 연설로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렸고, 핵무기가 쿠바에 배치되는 것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겠다고 선언했다. 핵무기를 탑재한 미군 전투기들이 속속 동부 해안에 집결했다. 미해군은 항공모함 8척을 비롯해 90여척의 함대를 동원해 쿠바를 완전히 봉쇄했다. 세계의 눈은 온통 쿠바로 쏠렸다.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는 당황했다. 당시 소련의 핵전력은 미국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흐루쇼프는 1961년 열린 오스트리아 빈(Vienna) 회담에서 케네디와 한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케네디를 '지나치게 여린 지식인'이라고 파악한 흐루쇼프는 강한 허세를 부려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소련의 핵전력을 과장하면서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다가 최소한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양보를 얻어낸다는 것이 흐루쇼프의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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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측의 호전적인 인물들의 준동으로 사태는 급격한 위기로 치달았다. 특히 미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는 과감한 선제공격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참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년)'에서 신랄하게 풍자한 전쟁광 '터짓슨'은 바로 르메이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히로시마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도쿄 대공습'을 추진했던 르메이는 주저하는 케네디를 향해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쿠바의 카스트로도 흐루쇼프에게 선제공격을 요구했다.

10월 27일에 쿠바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쿠바 상공에서 미군 정찰기 U2기가 소련군 대공미사일에 격추돼 조종사가 사망했다. 같은 날 북극 지역에서 통상적인 정찰 비행을 하던 또 다른 U2기는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진입했다.

소련 방공부대가 U2기를 핵무장 폭격기로 오인해 먼저 공격을 감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쿠바 해역에서는 B-59를 비롯한 소련 잠수함 몇척이 수면으로 부상해 미군 구축함과 대치하고 있었다. 소련은 만약 미국이 쿠바를 공격한다면 즉각 베를린을 점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것은 곧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했다. 유럽에서는 연일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10월 28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흐루쇼프가 한발 물러났다. 케네디에게 친서를 보낸 흐루쇼프는 라디오 방송으로 쿠바 미사일 기지 철수를 발표했다. 라디오 방송을 소련의 기만술로 파악한 미국 각료들은 계속 침공을 주장했으나 케네디는 쿠바 봉쇄를 풀었다. 세계는 겨우 위기를 넘겼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미·소 정상 사이에 핫라인이 구축됐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이면에는 '주목받지 못한 조연'들이 있었다. 10월 27일 북극 항로를 비행하다가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한 U2기의 조종사 '찰스 몰츠비'는 소련 전투기들의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만약 몰츠비가 격추됐다면 아마도 전쟁은 알래스카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때 중국군에 붙잡혀 600일이 넘는 포로 생활을 겪은 베테랑 조종사 몰츠비는 활강비행을 감행하면서 무사히 귀환했다.

쿠바 해역에 배치된 소련 잠수함 B-59의 사비츠키 함장은 핵 어뢰 조립을 명령했다. 통신장비 고장으로 수면 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사비츠키는 이미 미국과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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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회의 중인 케네디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사진 | Universal History Archive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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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뢰통제장교 '아르키포프'의 설득으로 B-59의 핵 어뢰는 발사되지 않았다. 미공군 참모총장 르메이의 폭주를 막은 것은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와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 케네디의 보좌관 '케네스 오도넬'이었다. 그들은 선제 폭격을 주장하는 르메이를 저지하면서 케네디가 이성을 잃지 않게 도왔다.

케네디는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고뇌를 멈추지 않은 지도자였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얻을 승리에 매혹되지 않았고, 자신이 인류 문명을 종식시킬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지금까지 쿠바 미사일 위기만큼 많이 연구되고 분석된 역사적 사건은 드물다. 수많은 기사, 다큐멘터리, 논문, 영화 등이 1962년 쿠바 해역에서 벌어진 위기를 다뤘다. 역사를 해석하는 자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에 논리와 필연을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는 수많은 개인의 노력과 우연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은 각자의 자리에서 재앙을 막고자 분투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행운이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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