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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삶의 의지’는 오롯이 환자의 몫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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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의식이 없는 환자는 어떻게 깨어날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을까? 드라마 ‘조명가게’의 한 장면. 출처=디즈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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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환자 의지에 달렸지.”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에서, 또는 수술이 끝난 다음에 가족도, 의료진도 흔히 듣는 말이다.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결과를 기다려 보자는 뜻을 완곡하게 전하는 의례적인 표현으로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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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 환자의 의지라는 말은 사실 하늘의 뜻을 표현하는 다른 말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치료 경과는 하늘의 뜻이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 운행에 개입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그의 의지는 하늘의 뜻을 바꿀 수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니까.



우리는 이제 그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수술 이후에 환자가 깨어날지, 환자가 회복할지 여부가 이제 환자에게 달렸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불확실성이 있는 상황에서 그저 좋게 말하기 위한 수사로 기능할 뿐이다. 안 좋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혹시 또 모르니, 정도의 표현이라고 말하면 적절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사실 환자가 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이후 상황에 대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러 논문은 환자의 질환 인식이 이후 회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적고 있다. 예컨대 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회복을 늦춘다는 보고가 여럿 있고, 이는 꼭 정신이 신체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더라도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적인 시선처럼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이해하지 않더라도) 질환 인식은 치료 이후 관리에서 환자의 참여나 적극성, 약물 복용 정도, 치료 후 신체 관리 등을 바꿀 수 있는 요인이므로 의학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환자가 의식이 없거나 분명하지 않다면, 환자의 의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환자는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깨어날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놓고 드라마 ‘조명가게’는 씨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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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환자가 의식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신체를 빠져나온 그의 넋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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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보는 사회적 비극





원작 웹툰 ‘조명가게’는 기본적으로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물로서,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여러 안타까운 사연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10년도 더 전에 연재 시점에서 읽었던 이 작품은 강풀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그렇게 뚜렷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지는 않아서,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봐야 했다.



2024년 드라마 ‘조명가게’는 드라마 형식으로 옮겨오면서 바뀐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이유를 한국 사회의 비극과 연결 짓는다. 누군가는 아파트가 무너져서 깔리고, 누군가는 제대로 수리하지 못한 자동차 바퀴가 결국 문제가 되어 자동차째로 물 속에 잠긴다.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사건·사고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거나 자기 잇속만 챙겼던 누군가로 인해, 그와 무관한 이들이 억울하게 다치고 죽는 일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 사고들은 제대로 조명되거나 다루어지지 않으며 책임을 묻지 않은 채로, 그저 사고일 뿐인 것,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천재지변’으로 치부되고 만다.



원작 웹툰이 개인적인 이야기의 사적 정서를 충실히 전달하는 조용한 이야기로 다가왔다면 드라마는 최근에 벌어진 거대한 사건들의 압력을 그대로 끌어안으며 공적 정서를 표출하는, 마치 폭탄의 뇌관과 같은 이야기로 다가와 보는 사람을 버겁게 만든다. 의도적으로 드라마는 (비록 이들 사건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와 이태원, 더 멀리는 삼풍아파트와 성수대교를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들에 겹쳐 제시하며, 이런 참조는 작품 감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작품은 이런 억울한 사건·사고가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을 ‘중환자실’로 상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고가 나서 실려오는 사람들은 처음 응급실로 오겠지만, 회복하기 어려운 이들은 결국 중환자실에서 관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입원한 이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거나 의학적으로 수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 환자의 회복이 문제가 된다.



드라마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심각한 환자일수록 “환자 의지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심각한 환자일수록 의식이 없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의식 없는 환자의 의지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드라마는 다분히 영적 존재들의 의지를, 그리고 그런 존재들의 의지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려내어 질문에 답한다. 환자 본인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의지가 그를 붙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 고유의 정서라던 한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식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가 과거를 돕고, 과거가 현재를 도울 방법의 하나로서 제안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말하고자 한다. 이미 죽은 자들이 이 사고에, 비극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죽은 자들은 불러 일깨워질 것을 기다리고 있다. 과거가 제대로 기억될 때 그 아픔들은 제대로 감싸질 수 있다. 현실의 비극은, 사건과 사고는 언젠가 제대로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염원으로 갈무리한 그 마음을 드라마는 사후세계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 사회적 이야기 앞에서 나는 우리의 병원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환자가 의식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신체를 빠져나온 그의 넋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환자 본인의 의지가 아니면 누구의 의지가 있을 수 있는가. 있다. 돌보는 자의 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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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조명가게’는 원작 웹툰에서 그렇게 부각되지 않았던 중환자실과 간호사를 중요한 공간과 등장인물로 재설정하는데, 그것은 중환자실이 해결되지 못한 마음들과 정리되지 않은 사연들을 뒤에 감추어 놓은 공간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출처=디즈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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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핵심은 돌보는 이의 의지





환자가 의식이 없을 때 그 신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누군가 그를 돌보기 때문이다. 기계장치가 인공호흡기와 인공영양관, 정맥관 등이 그를 지탱하며 현대 의학의 눈부신 성공이 이들의 생을 이 땅에 붙잡아두고 있다고 많은 이들은 생각한다(그렇기에, 연명의료 중단은 인공호흡기나 투석 등 생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 장치의 중단으로 기술된다). 짧은 시간 안에 워낙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온 현대 의학이니만큼, 그 빛에 눈이 멀어 과학기술이 생을 붙들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환자의 곁에서 누군가 보살피지 않는 한 그가 생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욕창 방지를 위해 일정 간격으로 환자의 체위를 바꾸어 주는 일이다. 잠깐잠깐 환자를 돌려 눕히는 것은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그 돌봄의 노력이 없다면 뼈의 돌출부로 인한 압력이 환자의 조직을 죽여 궤양이 발생하고 심하면 조직 감염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욕창 방지를 돕는 환자 체위 변경 로봇도 등장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환자에게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돌보는 데 있어 누군가는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단순하다면 단순한 예부터 더 복잡한 일까지, 환자의 누운 자리는 누군가에 의해 돌보아져야 한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있고 의사나 간호사일 수도 있으며 간병사일 수도 있다. 아니, 이 모두의 일이기도 하고 때로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의식 없는 환자 위에 돌보는 이들의 의지를 겹쳐 본다. 돌보는 손길들이 지닌 의지는 별다른 가치 없는 잉여의 관심일 뿐일까.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돌봄의 핵심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그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 씀의 자리는 돌봄의 핵심이자 환자가 이 땅에 머무르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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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이의 의지가 중환자의 삶의 의지를 대신할 수 있을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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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픈 생명, 나는 그를 붙잡고 싶다





아니, 그러면 환자가 죽고 사는 게 돌보는 사람이 얼마나 애를 끓이는지에 달렸단 말인가, 그것은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어떻게든 살리고 싶고 다시 이야기라도 해 보고 싶어서, 아니 눈이라도 다시 맞추어 보고 싶어서 이렇게 가슴 졸이며 옆을 지키고 있는데, 이 사람의 삶과 죽음이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런 말은 아니다. 사실 ‘조명가게’와 작품 속 중환자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그것이 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미 늦게 발견된 뇌종양으로 급하게 수술을 받았던 장모님은 어느 정도 회복하는 듯 보였지만 지금 다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여러 상황이 겹쳐 뇌출혈이 발생했고, 이를 다행히 빨리 발견했지만 필요한 수술과 몸에 연결된 관의 개수는 늘어간다.



‘사위와 장모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나에겐 그분의 말씀이, 존재가 귀했다. 어련히 알아서 치과의사로서 자기 자리를 잘 잡을 것을 모두가 기대하던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던 나의 노력을 이상하거나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던 분이기에, 이제 의학적으로는 한 줌밖에 남지 않아 보이는 가냘픈 생명이지만 나는 그를 붙잡고 싶다.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 있는 장모님의 상태를 전해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내 마음 씀이, 지금 계신 주변 상황에 대한 염려가, 돌보는 사람으로서 나의 의지가 의식 없는 그의 의지를 대신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의 삶을 얼마간이라도 더 붙들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의 돌보는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것 또한 아니다. 그저, 돌보는 이들의 의지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니기를 같이 빌어볼 뿐이다.



김준혁 |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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