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강 금융평론가(linsk@hanmail.net)]
한동안 자본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사태는 이제 다음 달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에서 그 향방이 판가름 날 전망이다. 고려아연 사태는 회사의 최대 주주인 영풍(주)과 최고경영자가 동일한 주체가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두 주체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회사의 최대 주주는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을 빼앗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지원군으로서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끌어들였다. 시가 총액이 10조 원이 넘는 대형 기업을 사모펀드가 적대적 인수·합병(M&A)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고려아연 사태는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고려아연 사태에는 주주들뿐만 아니라 여러 관계자들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는데, 그 이해의 내용들은 고려아연 사태의 본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사모펀드 MBK 파트너스는 고려아연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가치 회복을 약속했다. 최대주주가 경영권을 갖게 한 다음 훼손된 주주가치를 회복하고, 모든 주주를 위한 적극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거꾸로 고려아연의 현 경영진은 MBK 파트너스를 약탈적 투기자본으로 규정하면서, 기업사냥꾼의 적대적 M&A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MBK 파트너스가 전체 주주와 구성원들의 이익에 반하는 독단적인 경영을 하여 주주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인다. 노동자들은 사모펀드의 적대적 M&A가 대규모 해고와 고용불안을 부를 것이라면서 이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다른 한편 영풍(주)의 주주인 메트리카 파트너스라는 헤지펀드는 영풍에 대해 정책과 거버넌스(지배구조)를 개선할 것을 촉구했는데, 묘하게도 영풍/MBK 파트너스 대 고려아연 구도는 사모펀드/헤지펀드 대 기업 구도로 전환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고려아연 경영진은 내용적으로는 이미 MBK 파트너스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경영을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주주의 가치와 주주환원을 우선하는 경영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경영권을 누가 차지하든 고려아연은 주주가치 중심의 경영으로 나가는 방향을 이미 결정한 셈이다.
고려아연 사태는 사모펀드 제도에서 제기되는 전형적인 문제점들을 보여준다. 먼저 차이니스 월 문제이다. "차이니스 월(만리장성)"이란 운용사 내부의 자문부서와 투자부서 사이에 담을 쌓아 정보 공유를 금지하는 규칙을 말한다. MBK 파트너스에는 크게 두 부문이 있는데 하나는 경영권을 인수하는 바이아웃(Buy Out) 부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모사채 등을 인수하는 스페셜 시튜에이션스(Special Situations) 부문이다. MBK 파트너스에서 고려아연의 M&A를 추진하는 부서는 바이아웃 부문이다. 그런데 과거 고려아연은 스페셜 시튜에이션스 부문과 신사업 상담을 진행하면서 비밀 유지 계약을 맺고서 회사의 사업 세부자료를 건네준 바 있다. 고려아연은 MBK 파트너스가 이 자료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바이아웃 부문에서 M&A를 시도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MBK 파트너스는 두 부서가 차이니스 월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교류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지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과거에도 자산운용사들의 차이니스 월 위반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여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차이니스 월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골드만 삭스는 진로(주)를 인수할 때 그 이전에 자문 역할을 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았다.
탈세, 특히 역외 탈세도 사모펀드와 관련하여 단골로 발생하는 문제점 가운데 하나이다. MBK에 대해서도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인수 활동을 벌이면서 세금은 국내에 납부하지 않는다는 문제 제기가 있다. 실제로 MBK 파트너스 대표는 탈세로 고발되어 수백억 원의 세금을 추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심 자산의 매각이나 기술 유출 문제도 사모펀드와 관련하여 생기는 전형적인 문제점들이다. 고려아연은 국가 핵심기술을 보유한 기간산업이다. 핵심 기술이 사모펀드에 의해 외부로 유출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 상태이다.
사모펀드의 담론적인 약속
영어의 프라이비트 펀드(Privat Fund)를 번역한 용어인 사모펀드는 글자 그대로 프라이비트하게 모집한 펀드이다. 여기에서 펀드는 여러 주체에게서 모은 돈을 의미하고, 프라이비트는 "개인적"이라는 것과 "비밀스럽게"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곧, 사모펀드는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모아서 운용하는 돈이라는 뜻을 갖는다. 사모펀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금융 규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일반적으로 금융은 규제산업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사모펀드는 규제가 본질인 금융산업에서 규제를 면제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면서, 거기에서 생기는 규제차익, 곧 규제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이익을 얻는다.
사모펀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사모펀드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특히 2008년 글로벌 위기 이후 이른바 양적 완화를 계기로 금융시장에 돈이 넘쳐 흐르면서 사모펀드는 초고속 성장을 이룩했다. 최소 18000개에 이르는 미국의 사모펀드는 약 7조 5천억 달러의 자산을 관리하면서 1100만 명 이상의 미국 노동자와 미국 바깥의 수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을 거느린다. 영국의 사모펀드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 수는 3000개 이상이다. 2012년 이후 파산 신청을 한 14개의 미국 최대 소매 체인 가운데 10개가 사모펀드 소유로 돌아갔다. 사모펀드의 영향력은 산업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삶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사모펀드 규모가 급증세를 보일 때 사모펀드의 투기적 활동에 대한 반감도 점점 커갔다. 이에 사모펀드 업계는 사모펀드의 사회적 유용성을 홍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의 사모펀드 업계는 사모펀드에 대한 반감을 줄이기 위해 2007년에 데이비드 워커(David Walker)에게 의뢰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워커 보고서"라 불리는 이 문건은 사모펀드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여러 이슈를 다루면서 사모펀드 운용사의 대응 논리도 담고 있다. 사모펀드의 투자와 운영에 대한 여러 중요한 사실과 이슈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사모펀드 연구에서 널리 인용된다. 이 보고서는 특히 사모펀드가 기업의 경영과 가치상승에 미치는 영향, 고용과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보고서는 사모펀드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모펀드는 피인수 기업의 경영진과 협력하거나 또는 기존 경영진을 교체하여 기업의 성과를 개선하는 전략을 추진한다. 피인수 기업은 비용 절감이나 수익 증대를 통한 경영 효율화, 리더십 개선, 전략적 변화 등을 추구하여 기업 가치를 높인다. 이 보고서는 사모펀드가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을 줄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고용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생긴다는 점도 다룬다. 특히, 비용 절감과 함께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도 덧붙인다. 보고서는 레버리지(부채)를 통한 투자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러한 방식의 투자를 통해 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될 때,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여러 주제를 다루는 워커 보고서의 핵심은 사모펀드가 단순히 수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경영 개선을 통해 기업 가치를 증대시키는 역할도 한다는 점의 강조에 있다.
워커 보고서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이념은 "더 나은 소유권"이다. 이 개념은 주주와 경영진 사이 이해의 일치 정도가 더 높은 상태를 말한다. 주주와 경영진의 이해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주는 주주가치의 상승에 목표를 두지만 경영진은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이나 외형 확대에 목표를 둘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가 생기면 주주와 경영진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나타날 수 있다. 사모펀드는 임원 임명이나 전략 실행, 업무 감독을 통해 주주와 경영진 사이 이해의 일치 정도를 높임으로써 소유권을 조직하는 더 나은 방법을 제공한다고 한다. 사모펀드는 주주와 경영진의 의사소통 사슬의 길이를 줄임으로써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기업을 누가 통제해야 하는가는 오래된 논의 주제이다. 1930년대에 미국의 자본주의를 관찰한 벌과 민스(Berle&Means)는 기업을 경영자들이 통제한다고 주장했다. 주식회사 기업의 흩어진 주주들은 배당에만 관심이 있을 뿐 경영자를 통제할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경영자가 기업을 통제하는 경영자주의는 갈브레이스가 미국 자본주의를 관찰한 1960년대까지도 이어진다. 경영자주의에서는 기업의 소유와 통제의 분리, 전문 경영자와 노동조합의 협력적 기업 통제가 강조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주주가 소유권 행사를 더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이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주식회사에서 주주는 회사를 대표하여 고용계약, 판매계약 등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경영자에게 위임한다. 주주는 이사회를 통해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계약을 하지 않도록 통제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주주의 경영권 통제가 잘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이리하여 주주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경영자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주주들 사이에서 높아졌다. 경영진에 대한 주주의 통제 강화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리인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주주는 위임자이고 경영자는 대리인인데,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대리인이 위임자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대리인의 목표를 위임자의 목표에 일치시키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처럼 주주가 더 적극적으로 기업 통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주주 자본주의라 불린다.
주주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주식시장과 기업경영권 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 경영진이 기업을 비효율적으로 경영하여 주가가 낮게 형성되면 이를 인식한 외부의 투자자는 그 기업의 주식을 주식시장에서 매입하여 경영진을 교체함으로써 다시 효율적인 경영을 되살릴 수 있다. 주식시장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주체가 사모펀드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모펀드의 성장은 주주 자본주의의 등장과 맥을 같이한다. 주주 자본주의는 현대 미국 경제의 핵심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그리고 사모펀드는 주주 자본주의 이념에 잘 들어맞는 금융기구이다. 사모펀드는 주주 자본주의를 통해 기업이 더 잘 운영될 수 있다고 약속한 셈이다.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이 10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고려아연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가치 회복' 기자간담회에서 MBK가 고려아연 최대주주로서 주주환원과 기업 거버넌스(의사결정구조) 개선 방안을 이사회 확대 개편 뒤 조속히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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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가 지배하는 세상
그렇다면 사모펀드는 그러한 약속을 잘 지켰는가? 사모펀드는 사회에 어떤 효과를 가져다 주었는가? 사모펀드는 지배구조를 개선하여 기업의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사회에도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효율성과 관련하여 사모펀드가 비용 절감이나 수익력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지, 기업의 가치를 유의미한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지는 투자자 쪽에서 바라본 중요한 성과 평가 기준이다. 사모펀드가 고용이나 생산성에 유리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기업이나 공공부문의 운용 방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지는 사회적 가치 측면에서 본 성과 평가 기준이다.
사모펀드는 투자자의 비밀 보장이나 투자 대상 면에서 금융규제에서 가장 자유로운 금융기구이다. 따라서 투자자 쪽에서 보면 사모펀드는 규제차익을 가져다 주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투자 기구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사모펀드가 고용, 생산성, 기업과 공공부문의 운용 방식에 유리한 영향을 가져다 줄 지는 미지수이다. 특히 워커 보고서도 지적하듯이, 사모펀드는 고용 수준과 안정성에 불리한 영향을 준다. 사모펀드가 기업의 단기 경영에 기반한 구조조정을 이끌어서 수많은 노동자를 실업자 대열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증 연구들은 사모펀드가 일자리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컨대,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시카고 대학의 연구원들이 2019년에 발표한 한 연구는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에서 상당한 일자리 감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사모펀드에 인수된 기업에서 2년 동안 평균 4.4%의 일자리 감소율이 나타났다. 토이저러스, 스포츠 오소리티, 아트 밴 퍼니처 등과 같은 사모펀드 소유의 소매업체들이 매장 폐쇄와 파산 절차를 통해 수십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는 사실은 이의 단면을 보여준다.
노동조합은 사모펀드가 소유한 기업에서 협상력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도 나빠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노동조합이 사모펀드의 기업 인수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제 노동조합 총연맹(ITUC)에 따르면 사모펀드가 인수한 회사는 임금과 복지 등 근무 조건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단체협상 참여를 거부하며,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심한 경우 경영진이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으로써 노조 파괴를 꾀하기까지 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주장이다.
노동재단(Work Foundation)은 노동조합의 해체가 사모펀드의 기업 인수가 내포하는 하나의 동기임을 설명한다. 유럽 노동조합 연합은 사모펀드가 인수한 회사에서 노사 합의 시스템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회사에서 노동자, 노동조합, 노사 협의회와 관련된 기존의 규범, 절차, 구조를 무시하려는 경영진의 의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영진이 노동조합 대표와 협상하거나 회사 정보를 알려주는 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에서 누구와 협상을 해야 하는지 불분명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사모펀드가 기업을 인수할 때 대부분 차입 매수(LBO)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은 기업의 수익성이나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파산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모펀드가 기업을 인수할 때는 보통 인수자금의 50~80%를 피인수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한 대출로 마련한다. 사모펀드가 피인수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기업을 인수하면 그 기업은 부채를 축소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고 그리하여 자산매각이나 구조조정을 시행해야만 한다. 윌리엄 라조닉이라는 유명한 금융경제학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모펀드가 회사에 빚을 떠안김으로써 돈을 미리 챙긴다고 묘사한다.
차입 매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기업이 파산할 가능성을 높이는데, 문제는 기업의 파산이 금융위기로 이어져 사회 전체에 부담을 안길 수 있다는 점이다. 사모펀드는 사회의 신용을 대량으로 끌어다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레버리지 비율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워커 보고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레버리지가 없다면 사모펀드라는 사업모델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모펀드는 사회의 신용을 대규모로 끌어다 쓰는 데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사모펀드나 기업은 유한책임제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이들이 파산하면 그 비용을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 이른바 손실의 사회화가 나타난다.
사모펀드는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대신 이전에 존재하는 자산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데 관여한다. 사모펀드 옹호자들은 사모펀드의 매니저가 자기의 전문 지식과 통찰력을 회사에 제공함으로써 가치를 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리하여 사모펀드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회는 흰개미 자본주의로 비유된다. 흰개미는 집이 무너질 때까지 기초를 갉아먹는 특징이 있다. 사모펀드가 생산적인 투자를 희생시키면서 경제의 핵심 부문을 부채 더미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비유한 것이다.
사모펀드는 뱀파이어 스퀴드(흡혈 오징어)로 불리기도 한다. 사모펀드가 기업 인수를 넘어서 주택, 의료, 공공 부문 등 시민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대부분의 영역에 진출해 있기 때문이다. 비영리 단체인 "사모펀드 이해관계자 프로젝트"는 미국에 30개 이상의 사모펀드 운용사가 5,100개 이상의 단지에 총 140만 채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 전체 아파트 2,300만 채의 6%를 차지한다. 사모펀드는 주택뿐만 아니라 의료, 요양, 교육, 공공운수 등에도 진출을 확대하는데, 사모펀드가 인수한 공공부문에서는 공공성이 후퇴하고 이용 요금이 올라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방식의 사모펀드 활동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 가치를 올린다는 원래의 약속과 거리가 먼 것들이다.
우리나라 사모펀드
우리나라는 2004년에 사모펀드 제도를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우리나라에서 사모펀드 개념이 도입된 것은 1998년이지만 법으로 제도화한 것은 몇 년 뒤였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나라가 사모펀드 제도를 도입한 시기는 론스타, 칼라일과 같은 외국계 사모펀드의 폐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던 때였다. 당시 사모펀드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외국계 사모펀드의 폐해가 심하므로 토종 사모펀드를 키워 이에 대항하자는 논리를 폈다. 일제 강점기 때 종로의 일본 폭력배를 몰아내기 위해 조선 폭력배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얼마 전에 자본시장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사모펀드 제도의 성과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20년 전에 도입한 사모펀드 제도를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자본시장 연구원의 보고서는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의 주가 흐름이나 수익성을 중심으로 평가했다. 고용의 양과 질(안정성, 급여 수준), 다른 제도(사회보장 제도)나 전반적인 기업 경영에 끼치는 영향 등은 보고서의 평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보고서도 평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사모펀드는 지난 20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말 사모펀드 약정액은 136.4조 원이고 사모펀드 운용사는 422사이며, 기관전용 사모펀드 수는 1,126개이다. 2005에서 2023년 사이 19년 동안 사모펀드 시장규모와 펀드 수는 연평균 기준으로 각각 20.6%, 27.1% 성장했다. 국내 사모펀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위 3개사인 MBK 파트너스, 한앤컴퍼니, IMM은 자산 기준으로 기존 재벌들의 규모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사모펀드 업계의 목소리는 매우 커져 있는 상태이다.
사모펀드가 성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규제완화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 완화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첫째, 사모펀드 운용사의 설립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운용사 설립이 쉬워져서 그 수가 늘어났다. 둘째, 사모펀드가 외부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의 비율도 높아졌다. 이는 사모펀드 자산 운용 규모를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셋째, 무엇보다 투자자의 범위가 넓어졌고 투자 최소 금액은 낮아졌다. 이는 소수의 고액 투자자에서 누구나 투자할 수 있는 방향으로 투자자 범위를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넷째, 운용사에 대한 감독, 정보제공 의무는 느슨해졌다. 사모펀드에 대해서는 규제가 아니라 "사적 자치" 원칙이 적용되었다. 금융감독 당국은 사적 자치를 내세워 투자자 보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데, 이 때문에 금융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금융규제 완화 덕에 사모펀드가 급성장했는데, 이 사모펀드가 수행하는 흰개미, 뱀파이어 스퀴드 역할에 대한 제대로 된 보고는 드물다. 예외적으로 민주노동연구원이 2022년에 발표한 자료는 사모펀드의 폐해를 잘 드러내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모펀드 진출 분야는 안 미치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사모펀드는 전통적인 제조 산업을 넘어 공공부문, 물류, 부동산, 도시가스, 인터넷은행, 카드회사 등 사회 전반에 걸친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모펀드 투자유형 가운데 주를 이루는 바이아웃 펀드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초기부터 고율 배당을 실시한다. 둘째, 인수 과정에서 빌린 자금에 대한 이자 비용을 대기 위해 회사 자산을 대량으로 매각한다. 셋째, 유상증자를 통해 사내 유보금을 주주에게 배분한다. 넷째, 투자자금 회수 목적 등으로 자본구조를 재조정한다. 다섯째, 투자자들에게 옵션에 따라 추가 수익을 보장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기업 가치의 상승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사모펀드와 국민 연금
사모펀드의 자금 원천은 부유한 개인, 금융기관, 연기금 등이다. 연기금은 대체투자란 명목으로 사모펀드에 맡기는 자금의 양을 점차 늘리고 있다. 사모펀드 운용사들은 사모펀드가 다른 투자수단보다 수익률이 더 높다고 선전하면서 연기금의 사모펀드 가입을 부추긴다. 운용사들은 사모펀드가 추가로 얻는 이익이 연기금에 귀속되고, 이것이 국민 노후와 재산 증식에 기여하여 연금 수급자에게도 도움을 준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쉽게 얘기해서, 사모펀드의 궁극적 수혜자는 평범한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모펀드가 실제로 초과수익률을 얻는가이다. 운용사들은 사모펀드 가입자들에게서 높은 운용 수수료를 받는다. 사모펀드가 그러한 수수료를 빼고서 시장수익률보다 높은 초과수익률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 대한 경험 증거도 별로 없다. 사모펀드와 헤지펀드를 연구하는 리처드 에니스(Richard Ennis)는 대체 투자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사모펀드가 연기금 수익률에 가치를 더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사모펀드에 맡겨진 국민연금의 자금은 기업 인수에 사용되는데, 그 기업은 노동자들의 고용을 불안하게 하고 나아가서 해고까지 한다. 그런데 국민연금의 자금 원천은 노동자들에게서 나온다. 사모펀드 제도의 옹호자들은 기업 경영자에 대한 사모펀드의 적대적 M&A 위협이 경영진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자본주의 경쟁을 작동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의 일차적인 피해는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일자리 감소로 나타난다. 여기에 더해서 사모펀드가 관여한 공공부문에서는 공공성 약화, 요금 인상 등이 나타난다. 결국 노동자들이 연기금에 맡긴 신용이 사모펀드의 지배력 증가로 나타나 연기금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 면에서 고려아연 지분 7.48%를 가진 국민연금이 MBK 파트너스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국민연금은 MBK 파트너스의 고려아연 인수를 마땅히 반대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형성된 국민연금이 노동자에 대한 사모펀드 지배력 확대의 지렛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움 받은 자료>
민주노동연구원, 《사모펀드 동향과 쟁점, 노동의 과제≫, 2022.
자본시장구원, 《국내 PEF의 가치 제고와 투자성과 분석: 제도 도입 20년의 평가≫, 2004.10.28.
Richard M. Ennis, "The Fairy Tale of Alternative Investing?", 2022.
David Walker, "Disclosure and Transparency in Private Equity", 2007.
[임수강 금융평론가(lins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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