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6 (목)

[매경춘추] 억지 한자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한때 신문 사회면에 이따금 등장하던 기사 가운데 하나가 '쓰리꾼' 얘기였다. 쓰리꾼이란 소매치기의 속어인데 일본에서 건너왔다. 소매치기란 일본말 '스리(すり)'에 '꾼'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소매치기는 '쓰리꾼' 외에 '겁수적(겁袖賊)'이란 한자말도 있다. 이를 풀이하면 '소매를 겁탈한 도둑'이란 뜻인데 이는 소매치기를 억지로 한자로 만든 말이다. 한 세기 전 신문에 더러 등장하던 표현이다.

요즘도 각종 마약 범죄가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한 세기 전에는 아편이나 모르핀 중독 문제가 큰 논란이 됐었다. 이때 생겨난 말이 '자신귀(刺身鬼)'인데, '(자신의) 몸을 찌르는 귀신'이란 뜻이다. 마약 중독자가 직접 자신의 몸에 마약 주사를 놓는 것을 지칭한 표현이다. 191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해방 후까지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라졌다.

'카츄샤'는 러시아권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종종 쓰이는데 동명의 러시아 노래도 있다. 매일신보 1918년 8월 4일자에 '賈珠謝(가주사)가 殺人(살인)'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얼핏 보면 '가주사(賈珠謝)'라는 사람이 살인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어떤 사람이 카츄샤 노래를 들으려고 가다가 실족사했다는 내용이다. '賈珠謝'는 카츄샤의 억지 한자말이다.

이처럼 필요에 따라 억지로 만든 한자말은 적지 않았다. '분통군(糞桶軍)'은 옛 푸세식 화장실의 똥오줌을 치우던 인부를 말하며, '추업부(醜業婦)'는 첩(妾)을 생업으로 삼는 여자, 또는 색주가나 창녀를 말한다.

겨울철 방한 모자의 하나로 불렸던 '남소위(南所爲)'는 '남(南)씨가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고금(高衿)'은 옷깃을 세운 '하이칼라'의 한자말이다. 한때 양복점 간판에 등장했던 '라사(羅紗)'는 포르투갈의 두껍고 쫀쫀한 모직물 라샤(raxa)에서 유래했다.

'호태루(豪太樓)'는 호텔(hotel)의 한자어이며, '보이(甫伊)'는 가게 등에서 심부름하는 소년을 일컫는 '보이(boy)'의 한자식 표기다. 또 '토수(吐手)'는 방한·방서용으로 팔뚝에 끼는 '토시'의 한자말이며, '사가리(四街里)'는 네거리나 십자로를 억지로 한자 표기한 것이다.

연세대학교의 '연세'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의 첫 글자를 합친 말인데 세브란스의 한자 표기는 '세부란시(世富蘭시)'라고 했다. '타구루(陀瞿婁)'는 인도 시인 '타고르'의 한자식 표기다.

수저(柶) 모양의 윷 가지를 던지며 논다는 '척사(擲柶)'는 윷놀이를 말하며, 동아줄(索)을 가지고 논다는 뜻의 '삭희(索戱)'는 줄다리기의 억지 한자말이다. 또 '정정(丁丁)'은 바둑돌 두는 소리 '떵떵'의 의성어 한자말이며, '아구창(아口瘡)'은 구제역(口蹄疫)의 일본식 한자말이다.

그 밖에 정해진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은 무부기(無夫妓), 반대는 유부기(有夫妓)라고 불렀다. 또 씨름을 각력(角力), 화투판을 화투국(花鬪局), 송충이를 송점사, 무쇠를 수철(水鐵), 왜못(쇠못)을 양정(洋釘), 비누를 석감, 여름 무릎 덮개를 하슬괘(夏膝掛)라고 썼다.

이상의 억지 한자말은 한·중·일 3국에서 사용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이미 죽은 말이 되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