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모여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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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연말이 되자 곳곳에서 지난 한해를 설명하는 어휘를 발표한다. 내가 알기로 지난 2001년부터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해오던 교수신문에서는 올해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의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지난 1995년부터 시민의 추천을 통해 ‘올해의 한자’를 선정하는데, 올해는 ‘금’(金)을 꼽았다.
영어권에서도 비슷하다. 사전을 만드는 곳이나 언론 매체 등에서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곤 한다. 미국의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2003년부터 이를 시작했고, 2006년부터는 온라인 조사를 통해 선정해 왔는데, 올해 꼽힌 단어는 ‘양극화’(polarization)다. 2004년부터 해온 옥스퍼드 영영사전은 편집국에서 후보 여섯 단어를 추리고 온라인 조사로 결정하는 방식인데 올해는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1971년 처음 한차례 한 뒤 1977년부터는 매년 선정해왔으니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는 독일어협회에서는 2021년부터 이어진 ‘신호등 연정’(신호등 색이 당색인 정당들의 연정)의 붕괴를 의미하는 ‘신호등 고장’(Ampel-Aus)을 올해의 단어로 꼽았다.
해마다 ‘말’을 선정하는 역사가 20년이 넘다 보니 그간 선정해온 말을 보면 역사의 흐름이 보인다. 예를 들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독일어협회가 꼽은 말은 ‘여행의 자유’(Reisefreiheit)였다. 아시아 금융 위기가 심각했던 1997년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한자’는 ‘도’(倒)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위한 촛불 시위가 폭발했던 2016년 교수신문에서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민본주의의 뜻이 담긴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고, 2021년에 영어권의 두 사전은 코로나19와 관련한 ‘백신’을 선정했다.
‘올해의 단어’ 역사에서 잘 보이지 않는 중요한 단어가 있다. 바로 ‘민’(民)과 ‘민주주의’이다. 교수신문의 ‘올해 사자성어’에서 ‘민’이 들어간 사자성어는 2016년 ‘군주민수’에서 한번 나온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의 ‘올해의 한자’에서는 한번도 선정되지 않았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2003년에 ‘민주주의’를 한번 선정했지만, 옥스퍼드 영영사전은 한번도 선정하지 않았다. 독일어협회 역시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1980년대부터 세계의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야말로 변화의 원동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서울의 봄과 5·18, 필리핀의 피플 파워 혁명, 한국의 민주화 항쟁,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천안문 사태, 칠레의 민주화, 아랍의 봄,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그리고 얼마 전에는 12·3 내란사태도 있었다. 현대사의 핵심에 민주주의의 존재감이 이렇게나 큰데도 관련 있는 말들이 ‘올해의 단어’로 잘 선정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크게 두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조사의 특성상 눈에 확 띄는 단어나 새롭게 유행하는 단어가 선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올해 옥스퍼드 영영사전의 ‘뇌 썩음’이 바로 그런 사례이다. 같은 맥락에서 세계적 흐름을 폭넓게 보기보다 각국 중심으로 생각하는 추세도 한몫할 것이다. 일본이 올해뿐 아니라 지난 2021년에도 ‘올해의 한자’로 ‘금’(金)을 선정했던 데에는 일년 늦게 치른 도쿄 하계 올림픽에서 일본이 금메달을 많이 딴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공적 담론이 부족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아서 이를 지키고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 링컨 대통령은 1838년 민주주의에 대한 열의가 약해진다고 주장했고 헌법에 담긴 민주주의 이념을 ‘정치적 종교’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링컨의 호소는 그때만 유효한 걸까. 오늘날에도 민주주의는 시민의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회적 담론을 각국에서 심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 뜻에서 나는 2024년 ‘올해의 단어’를 ‘민주시민’(democratic citizen)으로 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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