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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수)

[송두율 칼럼]친위 쿠데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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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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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각보다 9시간 늦은 포르투갈 12월4일 아침, 내 휴대폰에 ‘급보, 비상계엄령’이라는 문자가 갑자기 보였다. 하도 맹랑한 내용이라서 나는 가짜뉴스겠지 생각하면서 외신을 점검했다. 한데, 놀랍게도 모두 다 서울의 비상계엄령 소식을 머리기사로 올렸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회의사당 안팎의 모습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물음은 제3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라고 평가받는 한국에서 2024년에 이런 사건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였다.

무장한 군인이 의사당 안까지 난입한 숨가쁜 상황에서 비상계엄령을 반대한 야당 의원의 결연한 의지와 이들을 지킨 시민의 뜨거운 동참이 이번 정변 계획을 일단 좌절시켰다. 긴장의 시간 열흘 만에 탄핵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했다.

뜬금없는 이번 서울발 비상계엄 소식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인물은 올해 9월 사망한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였다. 일본인 2세로서 농업기술을 전공했고 후에 대학 총장도 지낸 그는 1990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집고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꺾고 승리했다.

그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도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이에 비판적인 의회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1992년 4월, 그는 군부를 동원해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언론 통제도 강화했다. 1993년 12월 신헌법을 발표해 재선의 가능성을 마련한 뒤 1995년 재선에 성공했다. 3선 금지조항을 비켜나가기 위한 ‘헌법해석법’까지 통과시켜 2000년 3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독재적 발상과 행태는 결국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의 집권 10년 동안 자행된 반인권적 통치행위와 부정부패에 일거에 폭발한 민심으로 쫓겨난 그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일본에서 팩스로 자신의 ‘사임’을 발표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영구한 도덕적 무능’을 선고하고 파면 결의를 했다. 2005년 말 재기를 노리고 칠레에 입국했으나 체포된 그는 2년 후 페루에 송환됐다. 그는 3년여의 재판 끝에 징역 25년형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올해 9월 사망했다.

권력의 정점이자 내리막 시작

물론 후지모리의 이 같은 쿠데타는 친위 쿠데타의 역사에서 전형으로 자주 이야기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남긴 유산과는 비교될 수 없다. 하지만 ‘후지모리주의’라는 정치적 유산의 지지자들은 이후에도 그의 딸 게이코의 대권 도전을 지원했다. 그녀는 세 번이나 결선투표까지 갔으나 근소한 표차로 패했다.

프랑스 혁명 후의 격변기에 유럽에서 ‘그랑드 나시옹’ 프랑스를 건설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를 거치면서 제1 총통이 되었고, 1805년에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812년 겨울 러시아 정복전쟁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락했다. 그는 2년 후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으나 한겨울을 나고 탈출, 파리로 돌아가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100일 천하’로 끝나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

40년 전 엘바섬에 들렀을 때 나는 나폴레옹이 유배 중에 기거했던 크지 않은 빌라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권력과 이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는 탈레랑(1754~1838·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켰으나 후에 그와 갈등을 겪었던, 유럽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동했던 외교관)의 말을 떠올렸다.

인류사의 큰 재앙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인 아돌프 히틀러도 이탈리아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처럼 1923년 뮌헨을 시작으로 해서 베를린 진군을 기획했으나 실패, 의회 진출을 통해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길을 택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막대한 배상금 때문에 허덕이던 독일은 1929년 대공황 발생으로 갈등과 혼돈의 수렁에 빠졌다.

이는 히틀러에게는 하나의 기회였다. 그가 이끈 나치당은 1932년 의회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제1당이 되었고 그는 1933년 총리가 되었다.

공산당이 베를린 의회 건물에 방화했다는 것을 구실로 총리에게 전권을 위임하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켜 친위대를 동원,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비판세력을 제거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1934년 8월 사망하자 그는 곧 총리와 대통령의 지위를 통합한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1인 통치체제를 철저히 구축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고속도로(아우토반) 건설과 같은 대규모 공공투자를 통해 실업자를 구제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수산업의 확충에 힘을 쏟았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보여준 가시적 성과 덕에 그는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39년 9월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결국 6년 동안 6500만명이 희생된 인류사의 최대 비극을 낳았고, 1945년 4월30일 그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완전히 포위한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

이미 지닌 권력을 바탕으로 더 많은, 더 완전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15년, 히틀러는 12년, 후지모리는 10년 권좌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친위 쿠데타의 성공은 권력의 정점이자 동시에 이의 내리막의 시작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의 기치인 공화주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한 나폴레옹을 흠모한 베토벤이 원래 교향곡 3번 <영웅>을 그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를 지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해 즉결처분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도 젊은 시절 히틀러를 독일 민족을 구원할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2차 대전 발발 이후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반나치주의자가 되었다.

‘정직, 기술, 노동’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집권에 성공한 후지모리는 긴축재정을 통해 경제분야에서 이룬 성과와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이라는 좌익 게릴라 소탕 등으로 일정한 정도 구축했던 지지 세력도 계속된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지금도 안심할 상황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1972년 유신체제의 출범과 몰락에서도 친위 쿠데타의 궤적을 볼 수 있다. 7년 동안 유지된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의 총성과 더불어 일단 끝났지만, 다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1980년 5월 유혈 쿠데타로 연결되어 반동의 시대는 적어도 1987년 6월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하룻밤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한 군인들이 의사당 안으로 난입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세계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페루처럼 거의 내전 수준의 정부군과 게릴라 사이 전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고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니 어떻게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상계엄 선언, 국회의 해제 요구 결의안 통과 그리고 이에 따른 해제까지 6시간이 걸렸으니 이번 친위 쿠데타는 실패한 쿠데타임은 물론이고, 단명한 것으로도 기네스북에 오를 것 같다. 가장 짧은 시간에 성공한 쿠데타로는 41년 동안 지속한 살라자르 독재체제를 시작 6시간 만에 무너뜨린, 1974년 4월25일 있었던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을 꼽는다. 이 무혈 혁명은 국민의 절대적 지지 때문에 그렇게 빨리 성공할 수 있었지만,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시민의 저항으로 그렇게 빨리 실패로 끝났다.

탄핵에 이어 내란죄의 우두머리로 윤석열은 이제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가 내린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라 통치 행위에 속하고, 지금은 분노하고 있지만, 국민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결단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지금의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안심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스 신화에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가 나온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 자리에서 곧 두 개의 머리가 나오는 괴물이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잘려나간 목 부분을 횃불로 지져서 새로운 머리가 나올 수 없게 만들었으나 한가운데 있는 머리는 죽지 않아서 거대한 바위로 짓눌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히드라와의 싸움에 수많은 헤라클레스가 횃불 대신 스마트폰 불빛을 들었다고 믿는다.

경향신문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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