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부국장 |
‘그와는 상종을 못 하겠다’라는 말이 영어로 뭘까 궁금했다. 인터넷 번역 사이트 몇 곳에 넣어봤는데 번역된 문장 중에 ‘he is an asshole’이 있었다. 한글로 재번역하면 ‘그는 나쁜 놈이다’로, 경멸적 뉘앙스가 그대로 포함된 의역이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이렇게 거친 표현을 썼을까. 그가 한국 계엄 사태 직후 ‘윤석열 정부 사람들과는 상종 못 하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는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의 주장에 고개가 갸웃해진 이유다.
美 등 해외 출처로 포장된 제보 이어져
외교관들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국회 질의에서 영어로 뭐였느냐고 묻자 김 의원은 “한글로 들었다”고 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이례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며 불쾌감 가득한 반박자료를 냈음에도 그는 발언을 수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손절하려는 것”이라며 미국이 출처라는 식의 주장을 지속하는 중이다.
방송인 김어준 씨는 국회에서 ‘한동훈 암살설’과 ‘북한 소행으로 위장’,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군 사살’ 시도 등을 터뜨렸다. 국내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에서 제보받았다고 했다. 이런 수준의 첩보를 다룰 수 있는 우방국은 미국 정도다. 그러나 미국 측과 수시 접촉하며 오랫동안 정보 교환을 해온 관계자들은 모두 “나도 모르는 민감한 내용을 어떻게 야당 정치인이나 방송인이 먼저 알겠느냐”며 고개를 내젓는다. 워싱턴의 한 인사는 “미국은 첩보를 다루는 데 매우 엄격하다”며 “상황 발생 며칠 만에 저런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면 최소 징역 25년 형을 받는다”고 했다.
12·3 계엄 사태 이후 믿기 어려운 주장과 제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설마 했던 내용 일부를 뒷받침하는 진술들이 나오고 있어서 최종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진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타국 정부에서 받았다는 식으로 포장해 사실인 것처럼 퍼뜨리는 것은 외교 관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다. 첨단 도감청 기술과 첩보 역량을 갖춘 선진국의 신뢰도를 허위정보에 덧입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일부라도 있다면 더더욱 경계해야 할 일이다.
계엄 세력의 무도함을 비판하는 쪽만큼 이를 감싸려는 반대쪽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극우단체 등이 퍼뜨리는 것으로 보이는 허위정보들은 외신을 인용하는 식으로 가공된 게 많이 보인다. BBC방송이 “한국인은 미개한 국민들이다. 법관들의 편향된 이념과 주체사상이 한국을 파탄내고 있다”고 논평했다는 글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돌았다. 영국의 대표 공영방송이 이런 천박한 논평을 낼 리 없건만, 이를 기자에게 보내준 한 보수 기업인의 반응은 “오죽하면 BBC방송까지 저렇게 하겠느냐”였다.
유창한 영어를 쓰는 외국인 해설자가 “계엄은 한국 내 북한의 국가 전복 시도를 뿌리 뽑기 위한 것”, “계엄군을 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낸 것은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의 선거 개입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동영상도 받아 봤다. 어느 매체인지 확인도 되지 않는데, 언뜻 해외 방송뉴스처럼 보이는 영상에 한글 자막을 달아놓으니 그럴싸했다. 미국 대선에서 부정선거 의혹을 퍼뜨리며 1·6 의회 난입 사태를 야기한 극우 음모론 집단 큐어논(QAnon)과 다를 바 없는 행태들이다.
‘한국판 큐어논’의 음모론 경계해야
진짜와 교묘하게 섞인 가짜는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허위정보가 반복적으로 퍼지면 확증편향을 낳고, 음험한 음모론에 씨를 뿌려 불신과 불안, 혼란을 부추긴다. 내년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나 이념적,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계엄령만큼이나, 어쩌면 계엄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