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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화)

[세상 읽기]그들은 이제 복지국가를 말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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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일까? 매년 복지국가론이란 강의를 하는데, 첫 수업에서 학생들이 다루는 토론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국가는 군대와 경찰 등 폭력을 독점한 기구로 ‘지배’라는 속성을 버릴 수 없는 늑대인가, 아니면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도구로 잘 길들여져 그 본질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이 토론 주제가 이토록 생생한 것이 되는 상황이 펼쳐질 줄 몰랐다. 12월3일 밤, 국회의사당 복도를 뛰어가는 계엄군의 모습을 실시간 지켜본 것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나에게 1980년 광주는 사진이었고, 1987~1989년 민주항쟁은 바깥의 거대한 일렁임이었으나, 2024년 내란 시도는 시시각각 라이브로 전송되는 국가 폭력의 위협이었다. 의회민주주의와 동시에 공동체가 통째로 위협당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게 되다니…. 2024년 12월은 사진도 일렁이는 풍경도 아닌, 모두의 삶이 휩쓸려갈 수 있는 토네이도가 될 뻔했다.

상상해 본다. 내란이 성공했다면 그들에게 복지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이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잡혀가는 상황이 펼쳐졌을 텐데 웬 한가한 상상을 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윤석열이 계엄을 통해 영속적인 독재체제를 꿈꿨다면 자신을 엄호하는 정치세력이 오래도록 지배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에도 지배의 필수품 중 하나는 ‘복지’였다.

전두환도 ‘복지사회’를 내걸었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전두환의 복지는 부당한 권력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달아주는 액세서리였다. 그때 복지의 본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콜로키움에서 시민들에게 빵을 던져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펙터클한 구경거리에 정신을 팔면서, 현실의 고통을 잊고 배고픔을 잠시 달랠 수 있는 것. 물론 전두환의 ‘복지사회’는 그만큼의 진실성도 없어서 쉽게 잊혀졌다.

2025년 그들이 한국을 지배했을 때, 복지는 어떤 모습일지 어두운 상상을 해본다. 아쉽게도 상상 속 새로운 버전의 윤석열 지배체제는 로마제국만큼 번영을 이루긴 어려워 보인다. 모든 시민에게 충분한 빵을 던져줄 유능함은 기대할 수 없다. 21세기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SF 애독자지만 상상이 상상답지 못하고 꽤 현실적이라 아쉽다. 현대국가의 일사불란한 행정과 디지털화된 정보체계를 통해 충분히(?) 가난하거나, 출산과 노동을 통해 국가에 이바지할 것이 철저히 입증된 경우에야 사람들은 복지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때 시민은 노동력 제공처이자 다스려져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복지라는 것을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던져주는 것으로 여기는 전제정치의 논리와 첨단 시스템의 만남이랄까. 처음에 ‘약자복지’를 내걸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시민을 권력의 원천이자 권리의 주체로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복지국가다. 그래서 복지국가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할퀴어지고 피를 흘려도 민주주의를 통해 늑대에게 고삐를 매고 행동과 정신을 바꿔내려 한 끈질긴 노력의 결과물이 복지국가다. 좋은 사회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로서 복지는 빠지지 않는다. 이 경우 복지는 증상에 덧바르는 연고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 숙고와 합의를 통해 사회를 바꿔나가고 문제를 예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40%에 육박하는 한국 노인빈곤율은 최근 2~3년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는데, 20~30년 후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기존 정책 패러다임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노동, 교육, 연금, 의료개혁을 복지국가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 봐야 할 이유다.

계엄을 통한 독재정치로의 회귀를 모의하고 실행한 이들은 물론, 이들을 옹호하는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한편이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은 복지국가를 말할 자격이 없다. 앞으로 복지국가에 대해 어떤 말을 한들 언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지 몰라 믿을 수 없다.

경향신문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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