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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한국계 장애인 인권운동가가 타고 다닌 전동휠체어, 美국민동전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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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시 박 밀번 헌정 동전 디자인 확정 발표

’스테이시의 캐딜락’으로 불리던 전동 휠체어에서 연설하는 모습

한국 성 ‘박’도 함께 표기돼

한국 느낌 살린 관련 굿즈도 만들 예정

커다란 뒷바퀴와 작은 앞바퀴가 있는 전동휠체어에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이 앉아있다. 한손은 가슴팍에 얹고, 다른 한 손은 앞을 향하며 무언가 말을 할 것 같은 모습이다. 한국계 미국 여성 장애인 인권 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한국이름 박지혜)이다. 주한미군 아버지(조엘 밀번)와 한국인 어머니(진 밀번)의 삼남매 중 첫째로 서울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미국 인권 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난해 한국계 최초로 미국 화폐 등장 인물로 선정됐다. 그의 생전 모습이 새겨져 내년 하반기부터 미국 전역에서 유통될 25센트(쿼터 달러) 동전의 도안을 미국 연방 조폐국이 18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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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 연방 조폐국이 확정해 공개한 스테이시 박 밀번 헌정 25센트 동전 디자인. 앞면에는 조시 워싱턴 초대 대통령, 뒷면에는 전동 휠체어에 탄 밀번의 모습이 새겨졌다./미 연방 조폐국(US M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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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가·디자이너로 앨라배마 주립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엘레나 헤이글러가 밑그림을 그리고, 조폐국 전속 조각가인 크레이그 캠벨이 새긴 동전 디자인은 전동휠체어에 앉아 연설하는 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폐렴 증상 때문에 기관절개술을 받아 목에 기관 삽입 끈을 두른 것까지 묘사한 것이다. 앞면에는 미국의 국부(國父)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뒷면에는 밀번을 새긴 동전은 총 7억개가 발행된다. 앞서 지난해 10월 미국 연방조폐국은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의 헌정 대상자로 밀번을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각 분야에서 미국 사회에 크게 공헌한, 지금은 세상에 없는 여성 20명을 선정해 2022~2025년 발행되는 25센트 뒷면(앞면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에 얼굴을 새겨 넣어 기리는 프로젝트다. ‘쿼터달러’라고도 불리는 25센트 동전은 마트·주차장·대중교통 등 일상생활에서 폭넓게 쓰이는 ‘미국 국민 동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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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시 박 밀번이 생전에 전동휠체어에 앉았을 때 모습. 밀번은 전동휠체어를 능숙하게 운전했고, 가족들은 '스테이시의 캐딜락'이라고 불렀다./스테이시 박 밀번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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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은 미국 재무부·연방 조폐국·의회 초당적 여성위원회·스미스소니언 여성사 협회·미국 국립 여성박물관이 공동 주관한다. 밀번은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차인 내년 발행 동전 주인공 다섯 명에 포함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1884~1962), 걸스카우트 설립자 줄리엣 고든 로우(1860~1927),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1951~2012), 시인이자 배우 마야 안젤루(1928~2014), 흑인 최초 여성 비행사 베시 콜먼(1892~1926), 라틴 팝 스타 셀리아 크루즈(1925~2003) 등이 포함됐다. 1987년 태어나 서른 셋의 짧은 삶을 살고 4년 전에 먼길을 떠난 밀번은 이들 사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지만, 그 때문에 밀번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증폭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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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WJLA방송의 '굿모닝 워싱턴' 프로그램에서 스테이시 박 밀번의 얼굴이 새겨질 25센트 동전 디자인을 소개하고 있다./WLJA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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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진 밀번씨는 20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아이가 어떻게 동전에 들어가게 됐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라며 “여기 거론된 후보만 1만 1000명이라고 하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스테이시가 후보가 됐고 결정됐는지 알아가고 싶다”고 했다. 밀번 부부는 2022년 연방 조폐국으로부터 ‘고인이 된 따님을 동전 인물 후보로 추천하려고 하니 동의해주실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듣고 얼떨떨했다고 했다. 이후 조폐국은 차근차근히 심사 통과·동전 인물 확정 소식을 알려줬다. 진 밀번씨는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꿈만 같다”면서도 “딸의 말과 행동이 미국 사회가 옳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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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스테이시 박 밀번의 생일이자 기일을 맞아 구글이 특별히 제작한 로고./구글 두들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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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번은 태어날 때부터 근육 퇴행성 질환을 앓는 장애를 가졌다. 부모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한 뒤 초등학교 4학년 때 낙상 사고를 겪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몸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서 사회 곳곳에서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리고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등 생각을 담은 진솔한 블로그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청소년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던 2007년 노스캐롤라이나의 공립 고교 교육과정에 장애인 역사를 포함시키는 사안을 공론화하고 관철시켰다. 젊은 인권운동가로 주목받으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선 당시 장애인을 위한 대통령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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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 조폐국의 아메리카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에 따라 25센트에 얼굴이 새겨지는 여성 인물들./미 연방 조폐국(US M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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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번은 노스캐롤라이나 메소디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는 장애인 인권 단체인 ‘장애인의 정의(Disability Justice)’를 이끌면서 자신보다 더 형편이 좋지 않은 유색 인종·저소득층·노숙자들을 돌보면서 소수자·약자 권리 증진 운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집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쉼터로 제공했다. 특히 2019년에는 캘리포니아 지역 전력 회사가 산불 대비 훈련 일환으로 일부 지역에 예고없이 전기를 끊어 산소호흡기 등에 연명하는 중증 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이슈를 점화하는데 선봉에 섰다. 전동휠체어에 앉은 그가 “이것은 범죄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구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장면이 신문과 방송에 소개됐다. 2020년 1월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그는 장애인과 저소득층,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마스크와 긴급 의약품·위생용품을 전달하는 긴급대응 팀을 구성해 활동했다. 하지만 지병인 신장수술합병증으로 서른세살 생일이던 그해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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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에 따라 얼굴이 25센트에 등장하게 된 여성들./미 연방 조폐국(US M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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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번은 고교생 시절 처음 전동휠체어를 탔다. 능숙하게 버튼을 조작하며 이동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오갈 때도 주눅들지 않고 ‘실례합니다. 지나갈게요’를 외쳤다. 이렇게 딸의 이동을 도와주는 고마운 전동휠체어를 가족들은 ‘스테이시의 캐딜락(미국의 고급차)’라고 불렀다. 하지만 전동휠체어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안그래도 약한 근육이 더욱 연약해질 수 있는 건 딜레마였다. 어머니 진 밀번씨는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만 아니면 딸을 업다시피 부축하고 이동시키며 근육을 훈련시켰다. 딸의 체취가 남아있어 유품으로 간직할 수도 있었지만, 장례식이 끝난 뒤 망설임없이 전동휠체어를 기부했다. “하나님에게 아이의 병을 고쳐달라고 33년을 기도했어요. 기적 같은 치료대신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주셨네요. 근육이 약했던 아이를 통해 다른 이들의 장애를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셨고 그들을 위해 앞장서게 하셨어요.” 그러면서 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족에게 “인내하고 견뎌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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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시 박 밀번이 전동휠체어에 탄 모습이 새겨진 반대편에는 여느 25센트 동전과 마찬가지로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다./미 연방 조폐국(US M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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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에는 휠체어에 앉은 딸의 모습과 함께 어머니의 한국 성과 아버지의 미국 성을 모두 합친 ‘STACEY PARK MILBERN’이라는 이름이 그가 이끌던 장애인 단체 이름(DISABILITY JUSTICE), 미국의 라틴어 슬로건(E PLURIBUS UNUM 여럿을 위한 하나)과 함께 새겨진다. 평소 “나는 스테이시 밀번이 아니라 스테이시 박 밀번”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계임을 자랑스러워했던 딸이다. 한국의 장애인 인권단체들과 협력하며 한·미 우호의 범위를 넓히는 청사진까지 계획했던 딸이다. 밀번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의 발행 축하 기념행사는 내년 8일 워싱턴DC에 있는 미국 국립여성사박물관에서 열린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 기억되길 원했던 딸의 뜻을 이어받아 가족들은 동전 발행과 함께 출시되는 각종 기념품들에 최대한 한국 색채를 입힐 계획이라고 했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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