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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설마했는데…“몰라볼 뻔” 여장남자로 숨어있을 줄이야, 어떻게 찾았나했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트로이 전쟁②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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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신화편. 트로이 전쟁②]

아내 빼앗긴 왕 대규모 군대를 꾸리다

‘광인인 척-여성인 척’ 피하려 했지만

우여곡절 끝 최고 전사·두뇌 합류시켜

별들의 전쟁 시작 직전에 또 돌발상황

헤럴드경제

루이 고피에, 리코메데스의 딸들 사이에서 아킬레우스를 알아보는 오디세우스(일부 확대), 1791, 캔버스에 유채, 81.5x114cm, 스웨덴 국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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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처음부터 정주행하셔도 좋고, 시즌별로 봐도 좋고, 각 이야기를 단편처럼 읽으셔도 좋습니다. 엄선한 예술가의 풍부한 예술작품으로 몰입을 돕겠습니다. 각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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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인간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이 열렸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여기에 초대받지 못해 심술을 부린다. 행사장 한복판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친다’는 황금 사과를 몰래 놓고 사라진 것. 곧 올림포스의 여신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이를 놓고 갈등한다. 심판관을 맡게 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이를 아프로디테에게 바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던 아프로디테는 이 약속을 지킨다. 아프로디테가 점찍은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 스파르타로 간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와의 공조 끝에 헬레네와 야반도주를 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졸지에 아름다운 아내를 잃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분노에 휩싸인다. 트로이와의 전쟁을 결심한 그는 그리스 전역에 있는 왕과 왕자, 영웅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맹세를 행할 때가 됐다”고. 그 맹세는 무엇일까.

맹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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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헬레네와 메넬라오스(일부 확대),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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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가 직접 남편감을 고르기에 앞서…. 한 가지 맹세를 하는 건 어떨지요?”

헬레네가 아직 완전히 미혼이던 과거. 그러니까, 훗날 바다 건너온 사내와 야반도주를 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그 시절. 잔꾀에 능한 영웅 오디세우스가 연단에 올라 발언권을 잡았다. 이곳에는 헬레네가 있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각지에서 온 왕과 왕자, 영웅들도 있었다. 워낙 구혼자가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헬레네에게 남편 선택권이 넘어간 상황이었다.

“헬레네가 어떤 자를 남편으로 고르든 딴소리하지 맙시다. 또, 누군가 헬레네의 결혼을 방해하면 힘을 합쳐 응징합시다.”

오디세우스의 파격 제안에 모두가 웅성이기 시작했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헬레네가 수줍게 응수한 말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박에 바로잡았다. 그러다 한 명, 두 명… “좋소!” “받아들이겠소!” 곳곳에서 외침이 나왔다.

결국 수십 명의 구혼자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뜻을 모았다.

사실,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 티를 내면 바로 비겁한 자가 돼버리고, 남편감으로의 점수 또한 크게 깎이고 말테니.

구혼자들의 뜻이 하나로 모이자, 헬레네는 앉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섰다.

그녀는 고개를 든 백조 같았다. 역시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다운 모습이었다. 헬레네는 몇 명의 후보를 지나친 후, 훤칠한 남성 앞에 섰다.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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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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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남편으로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를 택하겠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많은 이가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내건 약속을 지켜야 했다.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미지근한 물 한 방울조차도 흘려보내지 못한 이유였다. 헬레네와 메넬라오스는 곧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얼마 후, 트로이에서 온 반반하게 생긴 사내가 헬레네를 낚아채고 만 것이었다.

수치심에 젖은 메넬라오스는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피의 복수를 꿈꿨다.

그는 헬레네를 데려간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물론, 트로이라는 나라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메넬라오스는 당시 구혼자들이 한 옛 맹세를 끌어올렸다. 나와 헬레네의 결혼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니, 함께 모여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 시절 구혼자들 모두가 군을 이끌고 출격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 작자가 보이질 않는군.”

메넬라오스가 이들 모두의 면면을 살펴본 뒤 말했다. 공석의 주인은 당시 호기롭게 그런 제안을 한 자,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였다. “메넬라오스 왕이시여. 확실한 승리를 위해선 그의 머리와 입이 필요합니다.” 메넬라오스는 참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광인이 된 잔머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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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광기를 연기하는 오디세우스(일부 확대), 17세기경, 249.5x198.5cm, 프투이 오르모즈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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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 인간이 오디세우스라는 말인가?”

오디세우스가 통치하는 땅, 이타카로 직접 온 메넬라오스는 미치광이로 보이는 한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몰라보리만큼 행색이 초라하긴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확실합니다.” 메넬라오스와 함께 온 그의 이종사촌 팔라메데스가 말했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머리의 오디세우스는 거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도 이타카의 궁이 아닌, 웬 외진 들판이었다.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황소와 당나귀를 함께 묶어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땅에는 씨앗이 아닌 소금을 뿌리는 모습이었다. “쑥쑥 자라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도 흥얼거렸다. 소금의 짠 기운이 외려 땅을 마르게 한다는 건 그 시절에도 상식이었다. “총명하셨던 우리 왕께서 얼마 전부터 미쳐버렸습니다.” 메넬라오스를 따라온 오디세우스의 신하들은 이런 말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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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광기를 연기하는 오디세우스(일부 확대), 17세기경, 249.5x198.5cm, 프투이 오르모즈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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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시여. 저도 오디세우스만큼의 잔머리가 있지요. 저 인간은 일부러 저런 꼴을 보이고 있을 겁니다.” 당황한 메넬라오스 곁에 선 팔라메데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팔라메데스의 생각이 맞았다.

오디세우스는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혼미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오디세우스의 마음도 복잡했다. 그 또한 그가 내건 맹세가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줄은 몰랐다.

사실, 그가 헬레네와 그녀의 구혼자들에게 약속을 내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는 숨겨둔 뒷거래를 이행한 데 불과했다. 오디세우스도 처음에는 헬레네에게 청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을 본 후 바로 뜻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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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프리마티치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1563년경, 캔버스에 유채, 빌덴슈타인 컬렉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둘만의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의 연이 맺어진 과정은 평범하지 않지만, 결혼 후부터는 둘 다 진실한 애정을 쏟으며 화목하게 살았다. 아들 텔레마코스를 얻은 뒤 서로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트로이 전쟁 국면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에게 “내가 10년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혹은 내가 없는 사이 텔레마코스가 성인이 되면 원하는 이와 재혼하라”는 당부를 남겼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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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그는 헬레네의 양아버지(헬레네의 친아버지는 제우스였다….) 틴다레오스를 찾았다. “헬레네가 누구와 결혼하든 후폭풍이 생기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틴다레오스가 걱정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게 무엇이오?” 역시나 틴다레오스는 반색했다. “그 대신…. 저와 헬레네의 사촌 페넬로페 사이 결혼을 주선해주셔야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거래를 제안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헬레네의 명성에 가려져 있을 뿐, 페넬로페 또한 대단한 미녀라는 점을.

오디세우스는 틴다레오스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 뒤, 헬레네를 향한 구혼자들 사이 그런 약속이 이뤄지게끔 분위기를 이끈 것이었다. 오디세우스 또한 깔끔하게 승복한 척 물러섰다. 얼마 후 모른 척 페넬로페와 따로 만나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예쁜 아내, 게다가 얼마 전 세상 빛을 본 귀여운 아들…. 오디세우스는 이를 두고 트로이 원정에 나설 뜻이 추호도 없었다.

“전쟁터로 가면 20년 동안 집에 오지 못한 채 방황하리라.” 혹시나 해 들어본 신탁까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메넬라오스의 동원령이 떨어진 순간 광인 행세를 한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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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광기를 연기하는 오디세우스, 17세기경, 249.5x198.5cm, 프투이 오르모즈 박물관> 광기에 휩싸인 척 말과 소를 끌고 끝없이 쟁기질을 하던 오디세우스가 자기 아들 텔레마코스 앞에서 두 짐승을 멈춰 세우고 있다. 텔레마코스를 짓밟으면서까지 혼미한 척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메넬라오스의 이종사촌 팔라메데스가 바로 앞에서 옆모습을 보인다. 텔레마코스를 이용한 계책을 짠 그는 불행히도 오래 살지 못했다. 오디세우스는 이번 굴욕을 잊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훗날 치러질 트로이와의 전쟁 중 팔라메데스에게 내통의 누명을 씌운다. 특유의 주도면밀함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없애버린다. 팔라메데스는 결국 병사들의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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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디세우스를 제정신으로 돌려놓겠습니다.”

팔라메데스가 망연자실한 메넬라오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팔라메데스는 메넬라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 자리를 일어섰다. 그가 안고 온 건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였다. 그는 이 갓난아기를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았다. 그런 뒤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잘 보십시오. 오디세우스가 제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곳만은 피해서 쟁기질을 할 겁니다. 정말 혼이 빠졌다면 끝내 아들을 죽일 테고, 혼이 빠진 척을 하는 게 맞다면 결국은 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을 겁니다.” 메넬라오스는 오디세우스의 눈을 봤다. 그의 동공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끝까지 연기를 이어가던 그는, 곧 쟁기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디세우스여. 어서 오시게.” 속임수가 들통난 오디세우스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마지막 전사의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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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리코메데스 왕의 궁정에서 아킬레우스를 찾는 오디세우스,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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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마지막 퍼즐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인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내, 아킬레우스를 이번 전쟁에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이번 건 또한 쉽지 않아보였다. 일단, 당장의 아킬레우스는 소식조차 묘연했다. 자기를 찾을 것을 알았는지 어느 순간 증발하듯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와 달리 아킬레우스는 헬레네에게 구혼한 적도 없었다. 즉, 겨우 찾는다고 한들 함께 할 명분이 없었다. 그뿐인가. 아킬레우스를 지키려고 하는 어머니 테티스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아르고스의 유명한 예언자 칼카스에게 “아킬레우스가 있어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을 이미 들어버렸기에. “아킬레우스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짐작이 가오. 내가 직접 가보리다.”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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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카 카우프만, 리코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서 아킬레우스를 발견한 오디세우스, 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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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장수로 변장한 오디세우스가 간 곳은 스키로스섬의 왕궁이었다.

그는 번쩍이는 수레를 끌고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리코메데스 왕의 딸들이 모인 방이었다. 젊은 여인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수레 위 가득 쌓인 목걸이를 쥐고, 귀걸이를 걸어보고,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등 현장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정체를 숨긴 오디세우스는 이들과 섞이지 못하는 금발 여인을 보고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한 앳된 외모의 그녀는 아름다웠다. 큰 키와 날렵한 몸매 또한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녀는 수레 위 보석을 휘적이며 무언가를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검이었다. 치장품 사이 숨겨둔 미끼였다. 그것을 쥐고 들어올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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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고피에, 리코메데스의 딸들 사이에서 아킬레우스를 알아보는 오디세우스, 1791, 캔버스에 유채, 81.5x114cm, 스웨덴 국립 박물관> 신이 난 아킬레우스가 검을 빼든 데 이어 번쩍이는 투구까지 쓰고 있다. 본인이 여장을 한 채 숨어있는 상황이란 점을 새하얗게 잊은 듯하다. 엉거주춤하게 선 모습이지만, 큰 키와 근육질의 몸 등 풍채 또한 심상찮다. 그 사이 리코메데스의 ‘진짜’ 딸들은 옷과 장신구, 거울과 악기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이다. 만물 장수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는 그런 아킬레우스를 뒤에서 덮칠 기세로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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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 여기에 있었군.”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니까, 아킬레우스는 여장을 한 채 섬나라 공주들 틈에 섞여 숨어있었다. 퓌라 혹은 아이사, 케르퀴세라 등의 가명을 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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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아킬레우스를 스틱스강에 적시는 테티스(일부 확대), 1630~1635, 패널에 유채, 44.1x38.4cm, 보에이만스 판 뷔닝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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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과거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 이야기를 다시 꺼내와야 한다.

그러고 보면,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왜 인간과 가약을 맺었을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비견될 만큼 예뻤던 그녀는 왜 크게 유명하지도 않은 이를 남편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실, 이는 최고 신 제우스가 한 결정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테티스가 낳은 자식은 제 아비보다 위대해질 것”이라는 예언 탓이었다. 제우스에게는 불안함이 있었다. 테티스가 신이나 영웅과 이어져 아이를 낳는다면, 최악 상황에선 자기 자리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적당히 어중간한 이를 찾아 붙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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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아킬레우스를 스틱스강에 적시는 테티스, 1630~1635, 패널에 유채, 44.1x38.4cm, 보에이만스 판 뷔닝언 박물관>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어린 아킬레우스를 거꾸로 든 채 스틱스강에 빠뜨리고 있다. 살아있는 이가 스틱스강에 빠지면 불사의 몸을 갖게 된다는 말을 들은 뒤 보인 행동이었다. 테티스는 인간 펠레우스의 피가 섞인 아킬레우스를 이렇게라도 불사신으로 만들고 싶었다. 다만, 루벤스는 이 그림에서 테티스가 벌인 실수 또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발목 밑 부분은 적시지 않은 게 그것이다. 아킬레우스에게 약점을 만들어준 셈이다. 테티스는 여유가 많지 않은지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무리 여신이라고 한들, 죽은 이가 머무는 지하 세계에 오래 머물기에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당장 명계(冥界)의 수문장인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가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다. 테티스 뒤에선 뱃사공 카론이 망자를 열심히 실어 나르고 있다. 이들은 이승에서 스틱스강을 건너 저승으로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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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마친 테티스는 곧 아기를 낳았다. 아버지 펠레우스보다 위대해질 존재, 그 아이가 아킬레우스였다.

모성애가 피어난 테티스는 아들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스틱스강에 담갔다. 살아있는 이가 스틱스강에 빠지면 불사신이 될 수 있다는 설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발뒤꿈치를 잡고 흔드는 바람에 발목 아래는 적시지 못했다. 이는 훗날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이 된다. 이른바 ‘아킬레스건’ 부위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낳자마자 불사의 존재로 만들 만큼 아들을 사랑했다. 당연히 아들의 운명에 대한 신탁도 들어봤다. 그런데, 몽롱한 눈빛의 여사제는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을 예언으로 흘렸다. “아이는 전쟁에서 영광을 얻으면 죽는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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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드 브레이, 리코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서 찾은 아킬레우스, 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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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티스는 그리스 땅 거의 모든 영웅이 트로이와의 전쟁을 위해 모이자 그 예언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현존하는 인간 중 최고 전사가 된 아들도 참전 요구를 받을 게 뻔했다. 그래서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숨겼다. 아들의 눈과 귀를 가린 후 여장을 시켰다. 섬나라의 여자들 틈에 집어넣었다. “어머니. 저한테 갑자기 왜 그러세요?” “잠시만…. 잠시만 그렇게 있거라.”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유를 듣는 순간, 혈기왕성한 아들이 앞뒤 재지 않고 전쟁터에 뛰어들 게 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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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리코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서 아킬레우스를 찾은 오디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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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킬레우스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요?”

“이 많은 보석 틈에서 굳이 검을 찾아 빼들 사람은 많지 않소.”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를 붙잡고 지금껏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구슬리는 말도 적당히 섞어넣었다.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어머니 테티스가 그를 사실상 감금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저는 영광을 원합니다. 이 사태를 알게 된 이상 물러설 수 없지요.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아킬레우스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이제 모든 판이 짜였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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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가멤논의 마스크로도 알려졌던 마스크,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Jebulon, CC0,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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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로 진격할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아가멤논이 맡았다.

아가멤논은 아내 헬레네를 잃은 메넬라오스의 친형이었다. 당시 막강한 국가였던 미케네의 왕이기도 했다. 최고의 장수로는 아킬레우스, 거구의 대(大) 아이아스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신임을 받는 디오메데스가 꼽혔다. 총참모장 격으로는 오디세우스가 나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등에 따르면 아가멤논이 전함 100척, 메넬라오스가 60척, 아킬레우스가 50척, 오디세우스가 12척 등 규모의 군대를 몰고 왔다고 한다. 각국 영웅들이 동원한 전함은 1000척이 넘었다. 병력으로 보면 10만~12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속의 날이 밝았다.

그리스 연합군은 그리스 중부 항구 도시 아울리스에 모였다. 모두가 전함이 빽빽이 들어찬 바다 앞에 섰다.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출정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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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바위 위에 앉아있는 아가멤논, 기원전 410~400년경, 도기,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은 아가멤논이 바위에 걸터앉은 채 생각에 잠겨있다. 아가멤논이라는 이름의 어원 또한 ‘많이 생각하는 자’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이러한 이름 뜻과 달리 성급한 판단과 연이은 오판으로 연합군을 수차례 위기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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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았다.

순풍은커녕 미풍조차 스치지 않았다. 출정이 점점 미뤄졌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작정하고 바람을 막는 게 분명해보였다.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아가멤논 또한 초조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언자 칼카스에게 또 한 번 조언을 구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응수했다. 아가멤논은 어쩔 수 없이 칼카스를 찾았다. 그런데, 때마침 칼카스가 보고 있던 것은….

한편, 기어코 재앙을 몰고 온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고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끝내 트로이 전쟁의 불을 붙인 파리스는 형제들 사이에서 빈축을 샀다. 가장 크게 분노한 이는 헥토르였다. 그는 트로이의 왕세자이자 국가 역사상 최고의 전사였다. “너는 끝내 아버지와 도시, 백성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참사의 경험을 안기려고 하느냐.” 헥토르는 파리스에 대해 이렇게도 질책했다.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트로이 또한 전쟁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트로이의 총사령관은 헥토르였다.


<참고자료>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문학과지성사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디스 해밀턴, 현대지성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 트로이 전쟁, 스티븐 프라이, 현암사

일리아스, 호메로스, 숲

일리아스, 호메로스, 아카넷

일리아스, 호메로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특별 大기획 : 트로이 전쟁>

①“감히 날 무시해!” 홧김에 파놓은 함정 때문에…결국 온세상 난리났다

②“못 찾을 뻔했다” 설마 여장남자로 숨어있을 줄은…어떻게 찾았나했더니

<시즌 1 : 프로메테우스>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

<시즌 2 : 헤라클레스>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

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

7)“나랑 3년 노예계약해” 여왕과의 동거…‘강제여장’ 굴욕까지 참았더니

<시즌 3 : 테세우스>

8)미모의 아내 “저 남자 죽여야해요” 남편 현혹…소름 돋는 ‘속마음’은

9)‘소 머리-사람 몸뚱이’ 아기 태어났다…‘폭풍성장’ 거듭, 끝내 최후는

<단편>

■“제가 봤어요” 女납치 순간 밀고했다가…이렇게까지 ‘보복’ 당할줄은(시시포스)

■“죽은 아내 돌려주세요” 꽃미남의 눈물 호소…‘비장의 무기’ 꺼낸 사연(오르페우스)

■“父는 죽고, 친모와 결혼하고” 재앙같은 예언…당사자 아들의 기구한 사연(오이디푸스)

헤럴드경제

프랑수아 레옹 베누빌, 아킬레우스의 분노,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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