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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그 영화 어때] 서동욱이 떠난 ‘전람회’와 영화 ‘대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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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07번째 레터영화 ‘대가족’입니다. 이번 레터를 어찌쓸까 노트북 앞에 있다가 예기치 못한 소식을 듣고 잠시 망연해졌습니다. 18일 수요일 밤이었어요. 습관처럼 새로고침한 뉴스 속보에 한 줄이 떴습니다. ‘’기억의 습작’ 전람회 출신 서동욱 사망’. 직업이 직업인지라 누군가의 부고 기사를 일상처럼 대하고 직접 쓰기도 하지만 어떤 죽음은 특히나 곧바로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전람회’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은 아마 저와 비슷하지 않으셨을지. 가족에 대한 영화 ‘대가족’ 얘길 하기 전에 잠시 서동욱님에 대한 저의 짧은 기억 속으로 모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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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의 베이시스트 서동욱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시겠지만, 저는 대학원에서 그 분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MBA 수업 중 하루 특강 강사로 오셨거든요. 아직 코로나가 들러붙어있던 2022년 가을이라 줌 수업을 할 때였습니다. 그날 강의 제목은 ‘Looking at M&A through the lens of Private Equity’- A few random things about M&A they don’t tell you at business schools’. 쉽게 말해 ‘꼬꼬마를 위한 사모펀드’ 강좌였죠. 저는 MBA 졸업할 때까지 주로 마케팅에 관심이 있었고 사모펀드 비슷한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3시간 좀 못 되는 강의를 듣고 새로운 세계를 알았어요. 저 같은 꼬꼬마도 이해하기 쉽게 어찌나 강의를 잘하시던지.

“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회사를 사고 파는 일들을 업으로 해왔고 PE 쪽에서 어떤 식으로 회사가 transaction되는지를 잘 알고 설명드리게 된 상황입니다. 서울 홍콩 뉴욕 등지에서 일을 했고 최근에는 지난 8년간 모건스탠리라는 사이즈 기준에서 세계 1위인 투자은행 서울 부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는 회사의 종목 이름을 프라이빗 에쿼티라고 합니다. 한국말로 사모펀드입니다. 이름을 참 잘못 지은 케이슨거 같아요. 도대체 무슨 얘긴지. 사모펀드라고 하면 사모님만 생각나고. 정치하시는 분들까지 전부 다 사모펀드라는 이름을 걸고 넘어지셔서 이게 괴상한 형태의 사업이 아닌가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간단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강의는 Leveraged Buyout, Due diligence, Non solicit, Non compete, SPC/SPV 등등 기본 개념을 훑고 M&A 실제 사례까지 한달음에 달렸습니다. 위의 인용은 서동욱님 워딩 그대로입니다. 제가 그날 강의를 속기사처럼 받아쳐서 기록해뒀거든요. 못 알아들을까봐. 지금 그날 강의록을 다시 읽어봐도 참 강의 잘하셨어요. 그날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내내 했습니다. ‘전람회’의 서동욱은 음악도 잘하고 글도 잘쓰는 재능 넘치는 아티스트였는데, 그날의 서동욱은 유능한 글로벌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강의 끝에 질문 시간이 있었는데 “전람회 시절 음악을 지금도 가끔 들으시나요” 같은 질문을 해보고 싶었지만 진지한 강의 분위기와 너무 동떨어져서 번쩍 들려던 손을 슬쩍 내렸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렇게. 다음 기회는 없게 됐네요. 예전 사회부 데스크 때, 저희 신문 부음을 제가 출고했는데 가끔 멍한 머리로 그날의 부고를 하나하나 읽어보곤 했습니다.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기록하는 한 줄에는 어김없이 그가 남기고 간 가족들이 있었지요. 그제밤, 서동욱님의 부고에 적힌 형제상, 부친상이라는 글자 역시 타인은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기쁨으로 태어나 가족의 슬픔으로 돌아가는 많은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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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가 레터에 쓰려던 영화 ‘대가족’으로 돌아와봅니다.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개봉작 중 가장 인간적인 영화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간적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기쁨과 슬픔, 욕망과 좌절, 상처와 화해, 탄생과 죽음이 모두 들어있거든요. 오욕칠정의 한가운데 가족을 세워두고 어디까지가 가족인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어릴 때 전쟁을 피해 월남하던 주인공(김윤석)은 폭격으로 여동생을 잃는데요, 여동생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먹고프다 하던 음식이 만두였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서울에서 만둣집을 차리고 손맛이 유명해지면서 거부가 됩니다. 돈이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의사가 된 외아들이 갑자기 스님이 돼버려 대가 끊길 위기입니다. 버럭버럭 역정을 내는 주인공 앞에 “내가 손자”라며 두 아이가 찾아옵니다. 주인공은 만세를 부릅니다. 알고보니 아들이 의대 다닐 때 정자 기증을 500번이나 했고, 그 많은 정자 중에 태어난 손자라고 합니다. 기쁨에 들뜬 주인공은 유전자 검사를 맡기는데. 두 아이는 그토록 기다리던 핏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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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우성의 개인사가 알려지면서 가족의 법적 개념, 사회적인 규정도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죠. 이 시점에 영화 ‘대가족’은 누구든 생각해볼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쓰고보니 엄청 무거운 영화 같은데, 주제는 무게가 있지만 보여주는 방식은 코미디가 섞여 있어 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 ‘대가족’ 뒷부분의 한 장면이 가장 좋았습니다. 주인공 김윤석이 아이를 품에 안고 뛰는 장면이 있거든요. (여러분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으론 설명 안 드리겠지만 보시면 어떤 장면인지 아실 수 있을 거에요) 시사회에서 ‘대가족’을 본 이후 그 장면이 내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순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수십년 상처와 마침내 화해한 게 아닐지. 꽁꽁 얼었던 마음을 열면서 스스로를 용서해주고 받아들인 순간. 그 자신도 새로 태어나고, 그의 가족도 다시 만들어집니다. 참 잘하셨어요 박수를 쳐주고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이 드실지 어떨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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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 만든 분은 양우석 감독입니다. ‘강철비’(2017) 기억하시죠. 이번에 양 감독님 인터뷰 하게 되면서 ‘강철비’를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여전히 재밌더군요. 치밀하고 탄탄하고. 지금 개봉해도 흥행할 것 같아요. ‘강철비’ 만들던 고민의 깊이가 ‘대가족’에도 살아있습니다. 가족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나. 그런 의미에서 양 감독님 말대로 ‘강철비’보다 ‘대가족’이 더 무거운 작품이 맞는 것 같습니다. ‘대가족’에도 죽음과 죽음 뒤에 남는 가족이 나오는데, 그때의 ‘가족’이 어떤 가족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이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저희 신문 지면에 나간 양 감독님 인터뷰 기사 링크를 아래 붙일게요. 읽어보시면 ‘대가족’을 이해하기에 더 쉬우실 거에요. 오늘은 동영상 링크 2건을 붙입니다. 둘 중 윗쪽 동영상이 2001년 김동률 3집 ‘귀향’ 마지막에 실린 히든 트랙 ‘떠나보내다’입니다. 서동욱님이 작사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전람회’ 곡들이 다 그랬지만 가사가 참 서정적이에요.

‘넌 물었지/시간의 끝은 어디 있냐고/수없이 많은 날이 지나면/날 볼 수 있냐고/난 알았네/내일은 오지 않을 거란 걸/하지만 나는 말해주었네/그때엔 아마도 별이 지지 않을 거라.’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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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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