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2020년 10월7일 오후, 서울 국회 앞에서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왼쪽)과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이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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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제269조)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앞서 2012년 합헌 결정을 뒤집었다. 헌재는 “임신부의 임신 유지 여부 결정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라고 판시했다. 해당 법률은 개정법이 나오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존속한다.
#2. 2024년 6월. 한 여성이 임신 36주차에 임신중절(이하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경찰은 이 여성과 해당 병원장을 살인죄 피의자로 입건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지난 10월 법원은 위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국회의 후속 입법은 5년6개월째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기관들조차 갈피를 못 잡는 풍경은 인공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쟁의 어지러운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낙태죄를 폐지하되 법적 허용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면 논란이 잦아들까? 그럴 것 같지 않다. 논쟁 자체가 도덕적 딜레마와 법의 논리를 넘어서는 개개인의 윤리적 판단과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자유는 어떻게 서로를 반대하는가’는 민감하고도 첨예하게 주장이 갈리는 낙태에 대한 인식을 윤리학의 프리즘으로 분석한 책이다. ‘임신중절의 운리적 논쟁’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김상득 전북대 철학과 교수는 1985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박사 학위 논문도 같은 주제로 썼다. 이 책은 그가 임신중지의 윤리적 문제를 35년 넘게 파고든 연구 성과의 결정판인 셈이다. 지은이는 섣불리 임신 중지가 ‘옳다’ 또는 ‘그르다’는 결론을 내지 않는다. 대신 ‘여성의 자율권’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태아의 생명권’을 옹호하는 보수주의, 임신의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판단하는 절충주의까지 양극단과 그사이에 놓인 다양한 주장의 스펙트럼을 풀어헤치며 풍부한 철학적 사유로 인간 생명과 자유의 의미를 되짚는다.
생명과 자유는 어떻게 서로를 반대하는가 김상득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2만3000원 |
‘낙태’라는 용어는 자연유산과 인위적인 유산을 모두 포함하는데다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윤리학에서는 학문적 중립성을 위해 ‘(인위적) 임신중절’이란 표현을 쓴다. 지은이는 임신중지가 왜 ‘도덕적 문제’인지를 먼저 살핀 뒤, 자유주의 입장과 보수주의 입장의 논리적 토대를 세밀히 분석한다.
보수주의 논변의 대전제는 ‘무고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것이다. 여기에 ‘태아는 생명권을 지닌 인간 존재’라는, 자연법사상에 토대를 둔 믿음이 뒷받침된다. 그런데 얼핏 자명해 보이는 명제들이 임신중지 논쟁에서는 까다로운 의문을 낳는다. 태아는 ‘무고’한 존재인가, 그리고 태아는 ‘인간’인가? 무고하다는 건 다른 인간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인데, 태아는 임신부에게 일방적이고 전적으로 기생하는 존재다. 여성은 임신 기간 중 신체적·심리적 희생과 사회적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여성의 자율권과 자기결정권이 임신 유지보다 더 존중돼야 한다는 자유주의 변론의 논거 중 하나가 된다.
상반된 두 주장의 핵심에는 ‘태아도 인간인가, 그렇다면 어느 시기부터인가’라는, 과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난해한 질문이 깔렸다.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임신 22주에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와 임신 23주에 중절된 태아,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보수주의자들은 ‘유아살해는 그르다’는 공리를 태아 발달의 모든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주장한다. 갓 태어난 신생아나 출산 직전의 태아는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으며, 그렇다면 자궁 내의 태아, 배아기, 수정란 단계까지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이른바 ‘미끄러운 언덕길’ 논증이다. 그러나 이는 정반대의 결론으로도 쓰일 수 있다. 갓 수정된 난세포는 생명권이 없으며, 바로 다음 단계의 수정란, 배아, 태아 사이에도 각각의 도덕적 차이는 없다는 논리다.
지은이는 이런 난국을 ‘태아도 도덕적 지위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한다. 한 사회는 법규범과 별개로 일정한 도덕 규범을 공유한다. 예컨대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권장된다. 도덕적 권리와 의무를 지닌 존재가 도덕적 주체이다. 그런 도덕적 지위를 갖춰야 도덕공동체(사회집단)의 구성원 자격이 생긴다. 그런데 도덕적 의무는 칸트식으로 말하면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라야만 수행할 수 있다. 태아는 그런 자율성이 없다는 점에서 도덕적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도덕적 객체’도 있다. 태아의 도덕적 권리는 태아가 언젠가는 틀림없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자체 속성에서 비롯한다. 그 외연을 넓히면 하등생물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에 도덕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상식적 직관과는 맞지 않고 현실적 유용성도 없다. 이를 보완한 기준이 척추동물에게만 있다는 쾌락과 고통 감각(유정성)의 유무다. 그에 따르면 수정란-배아-태아라는 임신 3단계에서 도덕적 지위를 얻는 분수령은 제2기 배아기인데, 이 시기 임신중지는 피임과 유아 살해의 사이에 놓인다. 유정성 기준은 초기 임신중절에 대해선 자유주의적, 후기 임신중절에 대해선 보수주의라는 절충적 입장을 취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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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이어 태아가 출생 이후 인간과 같은 존재인지를 따지는 ‘자아 동일성’ 논리의 타당성을 살핀 뒤, 의학 발달로 새로 생겨난 딜레마를 검토한다. 예컨대 체외수정 기술은 인위적 의술 행위가 있어야만 인간으로 발달할 수 있는 배아를 창조했는데, 이는 태아가 자체 속성으로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주장을 논박한다. 수정란 착상을 방해하는 사후피임약은 자유주의뿐 아니라 온건한 보수주의 쪽에서도 도덕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지만, 안전성과 성 윤리라는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임신중지를 ‘정당방위’로 보는 주장은 어떤가? 특히 임신 상태가 여성의 건강 또는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라면? 지은이는 “태아가 산모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둘의 생명 유지 관계이지 태아의 의도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임신 중절을 정당방위의 표준적 사례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태아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산모에게서 ‘분리’하는 게 해결책이다. 그러나 천차만별의 의료 상황에서 이런 원칙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지은이는 페미니즘 관점의 임신중지론도 검토한다. 남성이 임신과 양육을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부담시키는 방식으로 여성을 부당하게 억압해 온 건 맞다. 그런데,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조건부 권리라는 점과 피임법이 충분히 발달했다는 사실은 성 해방론에 바탕한 임신중지의 설득력을 약화한다. 대신 지은이는 ‘사회적 임신중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임신 중지를 선택한 건 여성 개인이지만, 젠더 불평등, 미혼모에 대한 경멸, 임신·출산·자녀 양육에 대한 미흡한 사회보장 등이 그런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최소극대화의 원칙’에서 해법을 모색한다. 누구든 한 사회에서 최소수혜자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을 사람의 혜택을 극대화하는 차등적 부의 분배 방식을 말한다. 이를 임신중절에 적용하면,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몫이지만 양육은 남성의 책임으로 분담할 수 있다. 이처럼 남성에게도 동등한 책임을 지우는 ‘도덕의 상향 평준화’야말로 “태아 생명이라는 도덕과 양성평등이라는 정의를 모두 충족할 수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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