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경찰본색] 제주 4·3 사건 이후 계엄군 총살명령 거부
"부당함으로 불이행"…도민 378명 희생 막아내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문형순 경감의 약력. 2024.12.19/뉴스1ⓒ 뉴스1 김민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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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이 선포됐고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이 발령되면 모든 행정기관은 그 포고령을 다룰 의무가 생긴다"
(서울=뉴스1) 김민수 기자 = 조지호 경찰청장이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한 답변이다.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막아 자칫 계엄령 해제가 불발될 수 있었다는 지적에 대한 항변이었다.
비상계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군 간부들 역시 '군인 신분으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실제 경찰법 제24조 1항을 보면 "경찰공무원은 상관의 지휘·감독을 받아 직무를 수행하고, 그 직무수행에 관하여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불의한 명령을 용기 있게 거부한 경찰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1950년 8월 제주에서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거부하며 300명에 가까운 목숨을 살린 고 문형순(1897~1966) 경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주서 독립운동, 해방 후엔 경찰…모슬포 주민 100여명 살린 의인
1897년 2월 7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문 경감은 한국 의용군을 시작으로 임시정부 광복군 등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해방 후인 1947년 5월 제주경찰감찰청 경위로 경찰에 투신한 그는 같은 해 10월 한림지서장, 12월 세화지서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치안 유지에 힘썼다.
그리고 제주 4·3 사건으로 혼란이 계속되던 1949년 1월 초대 모슬포경찰서장 서리로 발령받았다. 모슬포 지역 주민 약 100명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문형순은 이들을 자수시킨 후 훈방해 목숨을 구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경감으로 승진한 후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정부는 치안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과거 좌익 또는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거나 그와 관련된 자들을 예비검속 해 집단 수용하는 조처를 내렸다. '예비검속'이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 통신문으로 하달했다. 지시문은 당연히 제주도 경찰국장에게도 전달됐다. 해당 지시문에는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 △전국 형무소 경비를 강화할 것이란 명령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 더해 같은 해 7월 8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검찰과 법원은 물론 경찰까지도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됐다. 계엄령 선포 이후 예비검속은 계엄군 주도하에 군·경 합동으로 진행됐고, 예비검속자에 대한 권한은 오직 군이 갖게 됐다.
제주도 경찰은 검속자에 대한 범죄 경중 급별 심사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제주도에 주둔 중인 해병대 계엄사령부에 이관했다. 등급은 A·B·C·D등급으로 분류됐다. D등급은 가장 중요한 자, C등급은 중요한 자, B등급은 경한 자, A등급은 애매한 자로 규정됐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 기준이 불분명했다는 점이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예비검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4·3 사건 당시 입산 활동을 했던 경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1950년 8월 30일 계엄군의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명령문. 당시 성산포경찰서장 문형순 경감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문서 상단에 적고 총살 명령을 거부했다. 2024.12.19/뉴스1(경찰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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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으로 불이행"…야만의 시대, 도민 살린 제주의 '쉰들러 리스트'
그렇게 제주에선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집행이 이뤄졌다. 이를 명령하고 집행한 곳은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방첩대와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도 경찰국이었다.
제주도 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은 1950년 8월 30일 공문을 통해 아래 내용을 전달한다.
"수제건에 관하여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 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 귀서에서 총살 집행 후 그 결과를 오는 9월 6일까지 육군 본부 정보국 제주 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함"
그러나 성산포경찰서에 내려진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은 집행되지 않았다. 문형순 서장이 군의 총살 지시를 거부한 것이다. 대신 문형순 경감은 공문 위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적었다.
이는 자칫 그의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결정이었다. 당시 그의 심경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문 경감의 결단으로 성산포 관내 예비검속자 278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슬포에서 구한 100여 명까지 합하면 378명의 희생을 막아낸 셈이다.
이후 그는 1950년 12월 경무과 감찰계장·인사계장 등을 지냈다. 이듬해 6월 경남 함안경찰서장을 지냈고, 1953년 9월 퇴직했다.
이후 그의 말년은 불분명하다. 증언에 따르면 퇴직 후 제주 시내에서 쌀 배급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는지 생계가 어려워져 극장의 매표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 병원에서 사망했다.
경찰법 제24조 1항에 이어 2항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국가경찰공무원은 구체적 사건 수사와 관련된 제1항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에 대하여 이견이 있을 때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념이 지배하던 시절, 문 경감은 경찰로서 불의한 명령에 따르기보다는 '생명'을 택했다. 최근 비상계엄 사태 당시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이들과 대비된다. 경찰청은 그를 '2018 올해의 경찰 영웅'에 선정했다.
kxmxs410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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