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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불빛을 꺼뜨리지 마”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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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204표.” 터질 듯한 환호가 국회 앞 대로를 흔들었다. 탄핵소추안 가결을 알리는 의사봉 소리와 함께 거짓말처럼 ‘다시 만난 세계’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건 정말 거짓말 같았다. 2016년 이화여대에서 시작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 현장, 이후 성평등을 외친 모든 투쟁 현장에 함께했던 이 노래가 역사의 한복판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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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데뷔한 소녀시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운동화를 신고, 발차기를 하며 박력 있게 춤추는 새로운 시대의 걸그룹이었다. 남녀 관계와 대상화된 여성성이 아닌 주체적인 꿈과 연대를 노래한 ‘다시 만난 세계’는 이 땅의 모든 소녀들에게 언제나 희망의 불빛으로 존재했다. MZ세대 여성의 투쟁가로 빠르게 자리 잡은 배경이다. 칼바람이 부는 여의도에서 이 노래를 힘껏 따라 불렀다. 목이 메일 때마다 응원봉을 더 높이 흔들었다. 그 순간 내가 정말 응원하고 싶었던 것은, 여성 혐오가 공기처럼 만연한 이 세상에 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싸워온 나 자신이었던 것 같다.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달궈진 곳.” 1963년, 마틴 루서 킹은 미국 내 인종차별이 가장 뿌리 깊었던 미시시피주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여성이 처한 현실도 마찬가지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잔혹한 교제 살인, 여성 혐오를 정치 전략으로 이용하는 위정자들, 마치 게임처럼 페미니스트를 낙인찍고 공격하는 야만이 판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집회 현장을 밝히는 MZ세대 여성은 기득권을 감동시키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게 아니다. 선명한 목적과 투쟁 방식, 조직력을 가진 정치 집단으로서 이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달궈진’ 사회를 바꾸고자 나선 것이다. 음식점에 선결제를 하고, 조화 시위를 하고, 시시각각 쏟아지는 정보를 선별하고 공론화하며 오프라인은 물론 온라인에서도 흐름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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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참가율이 가장 높은 MZ세대 여성과 가장 낮은 동 세대 남성을 ‘청년’으로 함부로 묶어선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대대로 불의에 항거한 대한민국 청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MZ세대 남성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지우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의 피해자가 여성뿐일 거라고 착각하고, 이 사회가 ‘집게손 시비’ 따위를 경청하고 공론장을 내어주는 동안 이들 중 일부는 집회 참가자를 조롱하고, 선결제에 동참한 연예인들을 공격하는 유해한 집단 문화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현실을 뼈아프게 직시해야 한다.

광장의 모든 여성이 응원봉을 든 건 아니다.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투쟁해온 집단과 K팝 팬은 성별과 세대, 연대 방식의 교집합이 크지만 일치하진 않는다. K팝 팬은 여성의 선호와 취향을 무시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끈질기게 생존한 ‘욕망하는 여성 집단’이다. 이들이 손에 쥔 응원봉은 가장 소중하고 밝은 빛인 동시에, 내 아이돌을 보러 가는 걸음마다 돈을 써야 할 정도로 상업화된 K팝 산업의 상징이기도 하다. 집회를 ‘K팝 파티’라 부를 정도로 장르의 위상이 높아지고 대중화되었지만, 이들은 갈수록 더 높은 벽을 느낀다. 그러나 응원봉을 들었건 아니건 이들이 MZ세대 여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집결했다는 건, 탄핵 국면을 통해 이 집단이 더 크고 강력한 정치적 집단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뜻한다.

2024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해 첫 곡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는 분들께 걸그룹 H1-KEY(하이키)의 ‘불빛을 꺼뜨리지 마’를 추천한다. 우리의 불빛이 계속 꺼지지 않기를. 뜨거운 가사를 옮기며 글을 마친다. “힘에 겨운 날 불어대는 바람 따위에 지지 마, 불빛을 꺼뜨리지 마. 안 된다는 말 나약해지는 맘 따위에 속지 마, 이 뜨거움을 잃지 마.”

▼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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