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교원은 그림, 사진, 예문, 대화문, 듣기 음원과 동영상 등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모두 담아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공들여 준비해 가르친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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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 직장갑질119 온라인노조 한국어교원지부 지부장
“부당 해고에 법적으로 대응하고 싶은데요.” ㅇ선생님이 조합에 새로 가입했다. 14년을 일해온, 방학에도 다음 학기를 위해 프레젠테이션(PPT) 파일을 만들라고 ㅇ선생님에게 지시했던 어학당이 지난 학기 계약이 끝난 뒤 새 학기 지원은 불합격 처리됐다고 통보했다. 비단 ㅇ선생님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다수 한국어 교육기관이 교육보다 수익을 우선시하면서 한국어 교원과 한국어 교육이 녹아내린다.
프레젠테이션 없는 수업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ㅇ선생님은 예문 하나, 그림 한장에도 의미를 담는다. 목표 문법으로 다양하게 발화하도록 사진도 찾아 넣는다. 그림, 사진, 예문, 대화문, 듣기 음원과 동영상 등,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모두 프레젠테이션 파일에 담는다. 선생님답게 공들여 구상하고 준비해 가르친 14년이었다.
활동지와 시험 문제도 만든다. 더 많이 연습해야 한국어가 늘고 다양하게 활동해야 수업이 활기차다. 짝꿍과 말하고 앞사람과 묻고 답하고 셋이 함께 이야기하고 넷이 모여 게임을 한다. 말하기‧듣기‧읽기‧쓰기 네 영역 출제는 배운 내용에 누락이나 중복이 없고 문제가 타당해야 한다. 문제를 만들어 풀고 고치기를 거듭하며 동료들과 검토한다. 학기가 끝나면 프레젠테이션 파일과 함께 활동지, 시험 문제를 학교에 제출한다. 이래 온 선생님이 해고당했다.
‘선취’ 그리고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노동 과정에서 인간성과 노동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선취는 창조적 성격을 강조한다. 인간은 노동 시작 전에 결과물을 구상하고, 그 바탕에서 목적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반면 경영자는 이윤을 늘리기 위해 노동을 쪼개 관리하고 컨베이어벨트를 들여왔다. 노동자를 작업 설계와 결정권에서 배제해 단순 실행자로 만들었다. 그 결과 창조성이 말살되고 소외가 생겨났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로 노동 계급은 내부에서 분화됐다. 선취가 노동의 본질적 특성이라면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이런 본질을 억압한다.
수업도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었다. 어학당 운영은 (극)소수 전임과 (대)다수 시간강사 체제다. 7만명 넘게 배출된 한국어 교원 자격증 소지자는 산업예비군이다. 어학당은 대기 강사진(강사 풀)을 운영한다. 학기(10주)마다 일부를 선발해 계약서에 ‘기간 만료 시 자동 종료, 평가 결과에 따라 재임용’이라고 명시한다. 신규 강사에게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내주면서 이대로 수업하라고 한다. ㅇ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이 피, 땀, 눈물로 만든 그 프레젠테이션 파일과 수업 자료다. 수업은 표준화되고 언제든 대체 가능해진 한국어 교육 노동자는 3개월마다 이 대학과 저 어학당을 떠돈다.
프레더릭 테일러와 헨리 포드는 장인을 노동자로 바꿨지만 그래도 표준화된 고체(!) 노동을 남겼다. 이제 견고했던 모든 것과 함께 한국어 교원도 대기 중에 녹아내린다. 고용은 계약으로, 근로자는 (가짜) 프리랜서로 바뀌고 강의는 주 15시간 미만으로 제한됐다. 노동에서 일로, 일에서 일감으로 흘러간다. 이른바 불안정 노동, 액화 노동이다. 한국은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진입해 20명 중 1명이 이주 배경 인구다. 이주민이 한국에 정착해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한국어 교육이 필수지만, 수익에 눈이 먼 기관에서 선생님은 위태롭기만 하다. 노동이 액화하면서 인간과 교육과 사회가 말라간다.
지난 11월3일 서울 종로구 에무시네마에서 ‘직장갑질119 온라인노조’ 출범식이 열렸다. 직장갑질119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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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교원은 고정된 직장이 없다. 직장이 없으니 직장별 노조는 언감생심이다. 어디서 일하든 모두가 이주민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온라인에서 직종별 노조로 모여 교육 노동자로 바로 서야 할 이유다. ㅇ선생님이 돌아오도록, 한국어 교원이 창조성을 회복하도록, 그래서 한국어 교육이 풍성해지고 다문화사회가 건강해지도록 온라인 노동조합에서 어깨를 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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