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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덕후에게 덕질만 걱정할 자유를!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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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난 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 손에 쥐어진 응원봉이 반짝이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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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것은 화염병이었고, 촛불이 되기도 했고, 휴대전화의 불빛이 되기도 했다. 손에 든 것은 달랐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 주말 국회의 탄핵안이 통과되던 시간, 나는 ‘응원봉연대’의 깃발 아래 있었다. 손에는 딸아이가 챙겨준 응원봉을 들고서.



이번 탄핵 정국을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응원봉에 있다. 탄핵안이 통과된 그 날 여의도를 가득 메운 건 응원봉을 든 청년들이었다. 응원봉은 케이팝의 상징이며,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상징한다. 그들은 왜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거리로 나왔을까?



케이팝의 ‘케이’(K)는 한국이며, 그래서 케이팝은 한국적인 음악이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말 노래를 한국인 가수가 부르고 한국인이 즐기는 것이 케이팝이었다. 초창기 케이팝이 막 태동하던 시기엔 그랬다. 그런데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케이팝은 그렇게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케이팝 그룹에 외국인 멤버가 있으며, 외국인 기획자, 외국어 노래가 등장한 지 오래다. 더 나아가 최근 데뷔한 몇몇 그룹에는 한국인 멤버가 한명도 없다. 그나마 한국 기획사에서 기획하고 만든 그룹은 ‘케이’의 한 가닥이라도 붙잡고 있지만, 엑스지(XG)라는 그룹은 그것조차 없다. 일본 기획사가 미국 프로듀서와 함께 만들었으며, 멤버 일곱명은 모두 일본인이고, 심지어 그들 스스로도 케이팝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하지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는 그들을 케이팝으로 분류하고 있다. 스포티파이는 왜 그들을 케이팝으로 분류했을까?



케이팝을 인적 구성이나 지역적 특징을 통해 규정하려는 시도는 이제 케이팝의 본질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케이팝의 내용에 주목해 볼 수도 있다. 흔히 언급되는 케이팝의 내용적 특징으로 절도있는 군무와 노래의 절묘한 조화, 또는 여러 장르의 혼합, 각자의 스토리를 갖는 멤버들의 역할 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 또한 모든 케이팝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본질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내용으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바라본다면 또 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기획사 시스템이다.



기획사 시스템은 소비자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케이팝의 전형적인 생산 방식이다. 케이팝 이전에 팝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아티스트였다. 하지만 기획사 제작 방식이 도입된 케이팝 시장에서 지배자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었다. 케이팝 시장의 주도권을 쥔 것은 겉보기에 아이돌 그룹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획의 산물인 것이다.



소비자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어떤 춤을 좋아하는지, 어떤 외모를 좋아하는지, 장르와 패션, 표정과 팬들과의 소통 방식 등 모든 것이 소비자의 선호를 고려하여 기획되고 설계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이제 케이팝의 생산 방식이 되었다. 그래서 기획사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 때부터 소비자에 밀착하여 그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팀을 하나하나 만들어간다. 그룹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팬덤이 형성되고, 그들의 문자투표로 생존하느냐 방출되느냐가 결정되고, 마치 ‘내 새끼’를 길러내듯이 소비자는 기획사와 함께 아이돌을 만들어낸다. 아티스트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아티스트가 있는 소비자는 운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시장을 떠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아티스트라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케이팝이 만든 시장에 소비자는 아이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자신의 취향을 충분히 녹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케이팝의 소비는 참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시민의 참여일 것이다. 최근 어느 유명한 가수는 “내가 정치인도 아닌데 목소리를 왜 내냐”고 말해 시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일면 그의 항변은 맞는 구석도 있다. 사실 정치는 정치인이 걱정하고 덕후는 덕질만 걱정할 수 있다면 그게 태평성대일 것이다. 하지만 응원봉을 든 사람들은 덕질을 뒤로하고 여의도로 모였다. 그날 국회 앞 단상의 사회자도 20대 청년이었다. 특히 응원봉을 든 20대 여성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케이팝을 사랑하는 그들은 자신의 참여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경험한 세대다. 그들이 여의도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모인 것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희망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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